[뉴스&뷰] 산재 이외의 질병·부상 치료로 상실된 소득 보전하는 안전망 필요...정의당, 총선 공약으로 제시

[라포르시안] "각 사업장, 기관, 학교 등은 ‘아파도 나온다’라는 문화를 ‘아프면 쉰다’로 바뀔 수 있도록 근무형태나 근무여건을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 이에 따라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큰 부담없이 등교나 출근을 하지 않고 외출을 자제하며 집에서 경과를 관찰할 수 있도록 전사회적인 제도화와 지지가 필요하다"

지난 16일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 정례브리핑에서 정은경 본부장이 생활 속에서 방역수칙 준수가 당연시되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한 발언이다.

'아프면 쉰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용형태, 회사 규모, 국적, 성별에 따라 누구에게는 내뱉어선 안되는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직장임에도 불구하고 '아파도 나온다'는 불굴의 투지(?)를 보여줘야 할 때가 많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업무와 관련성이 없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병가나 장기간 유급휴직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다. 업무상 재해, 즉 산재로 인해 발생한 질병이나 부상에 대해서만 병가가 보장된다.

산업재해로 인정된 '직업병'에 대해서는 요양급여와 휴업급여가 보장된다. 직업병이 아닌 질환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겨 노동력을 잃게 되면 실직과 함께 소득 상실로 이어진다. 기업별로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을 통해 상병휴가를 적용하고 있지만 대체로 짧은 기간만 인정되고, 장기간 휴직이 필요한 경우에는 퇴직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자가격리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에 출근해 고발조취된 사례도 적지 않다. 

대구시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 기간 중에 민원서류 발급을 위해 주민센터를 방문한 공무원, 자가격리 조치를 받고도 해당 사실을 숨긴 채 4일 동안 병원에 정상 출근한 간호사를 고발 조치했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아프면 쉬는 문화를 만들자는 지적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에도 제기된 바 있다. 당시 메르스 의심환자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격리 지침을 따르지 않거나 의심증상을 숨긴 채 일상생활을 유지한 사람들 때문에 추가 감염이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시민의식의 부재'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지만 부재했던 건 '시민의식'이 아니라 '올바른 노동환경'이었다.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아 격리치료를 받게 되거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에 들어갈 경우 곧바로 생계수단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방역에 협조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메르스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코로나19 감염으로 입원치료나 격리된 사람들에게 생활지원비와 유급휴가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특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예외적으로 지원하는 것보다는 아프면 쉴 수 있는 노동환경을 위해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건강보험 상병수당' 도입, 29년째 검토만 하는 정부 

가장 시급한 건 바로 '상병수당'의 도입이다. 상병수당이란 건강보험 가입자가 업무상 질병 외에 일반적인 질병 및 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상실되는 소득 또는 임금을 현금수당으로 보전해 주는 급여다.

현행 국민건강보험법 제50조에는 '공단은 이 법에서 정한 요양급여 외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임신·출산 진료비, 장제비, 상병수당, 그 밖의 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처럼 법적 근거가 있지만 상병수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급여 항목이다.

부끄럽게도 한국은 OECD 회원국 중에서 상병수당이나 소득보상보험 제도가 없는 국가다. <관련 기사: 한국의 건강보험이 '진료비 할인제도'에 불과한 이유>

우리나라와 달리 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상병수당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OECD 34개 회원국 중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국가는 의료보험이나 다른 공적보장 형태로 상병수당을 제공한다. 미국과 스위스의 경우 상병수당이 없지만 자발적 기업복지와 함께 민영 소득보상보험을 도입했다.

상병수당이 부재한 가운데 건강보험 보장률은 60% 중반을 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질병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과 소득 감소, 의료비 부담이라는 이중고가 '의료빈곤층'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로 고착화됐다. 

질병과 소득상실로 인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상병수당이나 상병휴직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앞서 국제노동기구(ILO)는 1952년 열린 국제 노동회의에서 '모든 질병에 대해 그 원인을 묻지 않고 급여를 지급하도록' 규정한 '사회보장의 최저기준에 관한 조약'(제102호조약)을 채택했다. 한국은 1991년 12월 ILO에 가입했지만 29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회보장최저기준조약에서 규정한 상병수당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앞서부터 시민사회와 노동계는 "상병수당의 조속한 도입은 질병으로 인한 생활임금을 국가가 보장함으로서 질병으로 인한 가계 파탄과 가족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라고 지적하며 상병수당 도입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2006년 작성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을 통해 "건강보험법 제45조에 상병수당을 임의급여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 시행령에 임의급여를 장제비와 본인부담보상금 두 종류로만 한정해 사실상 상병수당 지급이 제외돼 있다"며 "상병수당의 의무급여화 등을 통한 건강보험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상병수당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상병수당 도입보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가 더 시급하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 ‘상병수당’ 도입 심상정은 약속, 문재인·안철수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부는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이 질의한 '상병수당 도입 검토현황' 관련 서면답변을 통해 "상병수당 도입보다는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사료된다"며 "필수의료에 대한 충분한 보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상병수당의 상당 부분이 의료비에 지출될 가능성이 크므로 제도 도입의 실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건강보험공단에서 '상병수당 도입 논의를 위한 기초연구'를 진행하면 그 연구 결과를 참고해 상병수당 도입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정의당은 4.16 총선을 앞두고 발표한 보건의료공약을 통해 공공의료 강화, 전국민주치의제 도입과 함께 상병수당 도입을 제시했다,

정의당은 "문재인 케어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고,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여전하다"며 "OECD 국가 대부분이 시행하는 상병수당이 부재하고 돌봄에 대한 보장에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어서 질병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전체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며 "OECD 국가 대부분에서 시행하는 상병수당(질병수당)을 도입해 질병이나 손상으로 인한 생계비 걱정을 덜어 드리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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