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큰 병이면 대학병원을, 일상적인 병이면 동네의원을 가는 게 나아서 중소병원을 이용하지 않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보건의료 정책 추진 방향과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방향 등에 대해서 국민 인식 조사 및 정책 수요 분석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정리한 '미래 보건의료 정책 수요 분석 및 정책 반영 방안' 보고서의 내용 중 한 대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소병원 이용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47.4%는 중소병원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의료공급체계에서 중소병원은 그 존재감을 상실했다. 

동네의원은 어떨까. 이번 조사에 참여한 응답자 4명 중 1명은 동네의원 이용 후 1개월 이내에 동일 질환으로 대형병원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는 '보다 전문적인 검사·치료를 위해 동네의원에서 대형병원으로 의뢰’가 47.4%로 가장 많았다. ‘보다 신뢰할 수있는 검사 결과를 얻기 위해서 본인 선택 또는 진료의뢰서 요청’(29.0%), ‘상급종합병원 이용을 위해 동네의원에서 진료의뢰서만 발급’(12.6%), ‘최신 의료장비와 의료시설이 더 좋아서’(6.5%)라는 응답 순이었다. 동네의원 의료서비스에 불만족하는 이유는 ‘치료 효과가 좋지 않아서’(26.6%), ‘질병 진단을 신뢰할 수 없어서’(25.8%), ‘의료진(의사 및 간호사)에 대한 신뢰가 낮아서’(20.1%) 등으로 의원급 의료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중소병원은 존재감 자체를 잃었고, 동네의원은 접근성이 좋긴 하지만 의료서비스 질에 대한 신뢰도를 많이 잃었다. 결국 대형병원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이 추진되면서 상급종합병원의 의료비 부담 문턱이 낮아져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지는 모양이다. “아프면 먼저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선택 기준이 더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 된 건 누구 탓일까. 동네의원이나 중소병원의 의료서비스 질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황에서 아플 때 좀 더 믿을 수 있는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렇다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로 비용부담 문턱이 낮아진 것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의료비 부담을 환자의 대형병원 이용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삼는 게 타당하지도 않다. 

모두 '의료전달체계 부재'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의료체계와 의료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모든 국민이 적시 적소에서, 적정인에 의해 적정진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없다. 동네의원과 대학병원이 경증질환 환자 유치 경쟁을 벌이고, 지방에서는 응급실과 분만실 등의 필수의료 시스템이 무너졌다. 지방의 환자들은 큰 병을 치료하러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원정진료를 다니며 연간 수조원을 지출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형병원들은 끊임없이 병상을 확충하고 새 병원을 신축하면서 몸집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커진 몸집을 유지하려고 질병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환자를 보는데 골몰한다. 

그런데 최근 대형병원의 이런 몸집 키우기에 제동이 걸렸다. 바로 의료인력 확충 문제 때문이다. 대형병원은 그동안 전공의라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주당 100시간 근무로 돌리며 병상 확충을 해왔다. 하지만 전공의법 시행으로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이 제한되면서 그만큼의 인력부족 상황에 직면했다. 인건비 부담으로 의사인력을 확충하기보다 수술실 등에서 전공의가 하던 업무를 PA(진료보조인력)라는 간호사에게 맡기는 편법에만 눈독을 들인다. 간호사 인력 부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저임금으로 경력직 간호사가 빠져나간 자리를 인건비가 싼 신규간호사로 대체한다. 그마저도 적정인력이 아니라 부족한 수만큼만 채운다. 이런 상황에서 보장성 강화로 대형병원의 내원환자가 증가하자 "급증하는 환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 이게 다 문재인 케어 때문"이라고 비명을 지른다.    

정말로 문재인 케어 때문인가. 아니다. 의료전달체계 부재와 부족한 의료인력 때문이다. 경증환자는 동네 병·의원으로, 중증환자는 대형병원에서 적정진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환자들은 동네의원이나 중소병원 의료서비스 질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스스로 자신의 증상이 경증인지 중증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그 때문에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대형병원을 찾게 된다. 대형병원 쏠림 현상이 심해진 원인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탓으로만 할 수 없는 이유다.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 속에서 적시에 적정한 병원에서 적정진료를 받아본 의료이용경험이 부재하다.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기준이 바로 '아프면 대형병원으로'였다.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여기저기서 위기 신호가 울리고,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손을 놓고 있다. 국내 의료공급의 90% 이상을 민간병원이 책임지고 있다. 의료공급시스템을 개별 민간병원과 의료인의 이윤추구와 경영판단이 주도하면서 병·의원이 난립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펴던 민간병원의 경영논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의료전달체계 개편을 추진했지만 생존문제가 걸린 개원가의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공공의료 확충보다는 오히려 민간병원의 병상 확충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의료인력 수급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수가 가산이나 인력공급 확대 등의 임시방편을 남발했다. 뒤늦게 병상수급 조절에 나섰지만 이미 포화상태에서 퇴로가 없는 막다른 길로 내몰린 병원들이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의료전달체계 확립 없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대형병원이 경증, 중증환자까지 가리지 않고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을 방치하고, 동네의원은 박리다매 진료로 내몰리는 상황을 방치하고, 중소병원은 존재감을 잃고 폐업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방치한 채 보장성 강화를 추진하면 의료환경은 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우선은 보건의료기본법에 규정된 대로 국가 차원의 중장기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국가의 책임 아래 보건의료발전 목표와 방향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의료자원의 적정수급과 관리 방안, 지역별 적정병상 관리시스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의료기관 종별로 기능에 적합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관 운영이 가능하도록 적정 수가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 다 같이 망한다.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의료전달체계 확립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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