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간호사 자살사고 이후 '태움' 경험담 공개 잇따라...일터가 아니라 전쟁터가 된 병원

한 대학병원 병동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한 대학병원 병동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라포르시안]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계속 태워졌고 주눅들고 눈치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저를 싫어한다는 망상까지 생겼어요....지옥같아요. 하루하루 일하는게 너무 지옥같고 그 얼굴 그 목소리 들을때마다 너무 괴로워요."

모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자신이 겪고 있는 병원내 '태움(재가 될 때까지 태우고 괴롭힌다는 의미)'에 관한 심정을 간호사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며칠전 설연후 첫날,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업무 스트레스와 집단괴롭힘 등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이 일을 계기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혹은 지금도 겪고 있는 '태움' 사례를 공개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나도 한때 00병원 간호사였고, 나도 프리셉터가 일 안 가르쳐주고 방치하고 일부러 밥 먹이러 안 보내고 폭언과 폭력을 수시로 가했었다. 정강이와 팔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고 10kg 넘게 빠지고 늘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자살한 간호사 너무 내 얘기 같다" <SNS에 올라온 태움 경험 사례>

"항상 혼나고 출근 전 출근 후 맨날 눈물을 쏟으며 다니다가 우울증까지 얻었다. 약 처방받아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더라. 중요한건 일하면서 의지가 사라지는 거였다. 배울 의지 일할 의지 더이상 생기지 않고 막연히 다니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4개월만에 사직을 하고 몇달간 마음의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불안은 항상 따라왔다" <SNS에 올라온 태움 경험 사례>

사실 병원내 간호사 직종에서 벌어지는 태움이란 악습의 문제가 지적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지난 2005~2006년에는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 2명이 병원내 집단괴롭힘으로 인한 극심한 업무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오죽하면 간호사의 직장내 괴롭힘에 관한 연구논문도 여러 편에 달할 정도로 이 사안은 간호계 내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강지연 동아대학교 간호학과 교수는 2016년 4월에 발간된 '대한간호학회지(제46권 제2호)에 게재한 '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 경험에 관한 근거이론 연구' 논문을 통해 "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은 단순한 개인 간의 다툼이나 갈등이 아니라 업무 환경과 개인의 성향 등 복잡한 맥락적 조건 속에서 발생했다"며 "특히 병동의 조직문화와 간호업무의 특성은 괴롭힘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되거나, 병동 내에서 괴롭힘이 대물림되는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태움이라 악습이 간호인력이나 업무시스템 등의 업무환경과 개인의 성향 등 복잡한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수선생님한테 도저히 못하겠다고 두 번이나 갔었어요. 너무 힘든 거예요. ○○동에 ○자만 나와도 토할 것 같았어요. 진짜 밤에 누워있으면 심계항진에 가만히 있어도 우울하고, 일 시작하고 5kg이나 빠졌어요." <'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 경험에 관한 근거이론 연구' 논문의 면담 내용 중에서>

"더 나쁜 건 제가 밑에 한테 그렇게 하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할때...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제가 그렇게 하는 걸 느끼니깐... 그거를 뭐라고 해야되지...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되고... 저도 밑에 연차한테 안 그렇게 하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되요." <'간호사의 직장 내 괴롭힘 경험에 관한 근거이론 연구' 논문의 면담 내용 중에서>

근본적으로 이런 태움 병폐가 만성적인 간호인력 부족으로 인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국내 병원의 간호인력 상황을 보면 만성적인 인력부족으로 인한 높은 업무강도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지친 간호사들이 병원을 그만두거나, 더 나은 환경을 갖춘 병원으로 이직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됐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신규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은 33.9%이고, 간호사 평균 근속연수는 5.4년에 불과하다. 상당수 간호사들이 늘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경험이 많은 간호사 대신 신규 간호사 인력이 빈자리를 메우게 되고, 간호업무 수행의 연속성과 숙련성, 책임감은 떨어지고 의료 질 하락을 초래한다.

부족한 인력으로 빡빡한 간호업무를 수행하는 일이 만성화 하다 보니 간호사 직종 내부에서 폭언과 임신순번제 등의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은 겉돌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간호업무 수행을 위해 태움이 정당한 것처럼 인식되는 왜곡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열악한 근무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사직하는 간호사가 잇따르자 인력공백을 메우려고 신규 간호사를 제대로 교육시키지도 않고 업무에 투입하는 일이 관행화 되면서 환자안전에도 심각한 위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는 "신규 간호사는 2~4주 정도의 교육기간이 필요하지만 이를 담당할 프리셉터 간호사 인력부족으로 신규간호사를 교육하지 못했다"며 "갑작스런 사직 또는 병가가 있어 인력충원이 불가능할 때 교육을 채 마치지 못한 신규간호사를 독립적으로 일하게끔  배치했다. 이런 점은 환자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수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근무를 편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호사가 전문성을 키우고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노동환경 개선이 시급하다. 병원이 간호사 등 적정 의료인력을 확충하고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

전국보건의료노조는 "간호사들은 직무스트레스와 감정노동에 영혼이 소진되는 괴로움에 시달리다, 결국 병원을 그만두거나 외국 병원으로 이직을 꿈꾸는 것이 탈출구가 되고 있다. 이렇게 지금 한국의 간호현장은 폭발 직전"이라며 "인력부족으로 밥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시간외근무와 장시간노동을 실질적으로 근절할 수 있는 확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