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차원의 보건의료계획 부재 속 단편적 정책만 남발...의료체계 왜곡 부채질
복지부, 13년만에 보정심 열고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 본격화

혼잡한 병원 응급실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감염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혼잡한 병원 응급실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감염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라포르시안] 2000년 1월 제정돼 같은 해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보건의료기본법'은 헌법에서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건강권 보장하고, 이를 위해 국가의 건강권 보호의무를 보다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입법이었다.

실제로 보건의료기본법에는 보건의료에 관한 국민의 권리·의무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명시하고,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보건의료정책 수립을 위한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보건의료기본법 전문 바로 가기>

하지만 제정된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건의료기본법은 본래 입법취지를 달성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한 상징적인 법률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보건의료기본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장관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의 협의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이하 보정심)의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한다.

보건의료발전계획에는 ▲보건의료 발전의 기본 목표 및 그 추진 방향 ▲주요 보건의료사업계획 및 그 추진 방법 ▲보건의료자원의 조달 및 관리 방안 ▲지역별 병상 총량의 관리에 관한 시책 ▲보건의료의 제공 및 이용체계 등 보건의료의 효율화에 관한 시책 ▲중앙행정기관 간의 보건의료 관련 업무의 종합·조정 ▲노인·장애인 등 보건의료 취약계층에 대한 보건의료사업계획 등을 포함토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보건의료 부문의 발전 목표와 추진 방향, 의료자원의 적정 분배와 공급, 의료이용체계 효율화 방안 등을 마련하고, 여기에 맞춰 각종 의료정책을 추진토록 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의료체계를 갖추자는 취지다.

문제는 지금까지 보건의료 분야 주요 정책방향을 심의하는 기구인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정심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국무총리 주관으로 두 차례 개최된 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2010년 보건의료기본법을 개정하면서 보정심을 국무총리 소속에서 보건복지부장관 소속으로 변경했다.

보정심을 통한 국가 차원의 보건의료발전계획이 부재한 상황에서 단편적인 보건의료정책이 추진되면서 국내 의료체계는 엉망으로 꼬이고 말았다. 의료인력을 비롯한 지역간 의료자원의 심각한 수급 불균형을 비롯해 의료전달체계 부재, 지역간 의료양극화와 갈수록 심화하는 건강불평등 등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이 부재한 상태에서 복지부가 건강보험을 중심으로 한 보건의료정책을 추진하면서 질병치료 이외의 다른 쪽으로는 정책적 관심이 소홀한 문제도 발생했다. <관련 기사: [편집국에서] 보건의료기본법은 어겨도 괜찮은가?…복지부에 묻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5년 펴낸 '미래 보건의료 발전계획 정책과제 개발 연구'라는 보고서를 통해 "복지부 내 보건의료정책이 건강보험정책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상대적으로 건강생활습관, 건강증진, 질병관리 등 예방적 성격의 보건의료관리 정책에 대한 관심이 미흡했다"며 "또한 의료보장제도의 기반이 되는 의료인력, 시설, 장비 등 의료공급 부문에 대한 공급총량과 공급의 구조, 질적 관리 등에 대한 정책적 고려가 소홀한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지적했다.

전체 의료기관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민간의료기관의 경영적 판단에 기반해 의료공급이 이뤄지면서 지역별 의료자원 쏠림현상과 건강형평성 문제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의 부재로 대형병원과 동네의원이 환자유치 경쟁을 벌이고 병상의 공급과잉과 의료기관 간 과잉경쟁으로 인한 의료자원 낭비를 초래한다.

보건의료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도 심각하다. 국가 차원의 보건의료자원 조달 및 관리 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의료기관의 경영 전략에 따라 병상을 늘리고, 의료인력을 확충하다 보니 지역별, 병원별 의료자원의 불균형은 점점 심해진다.

국가의 보건의료 발전 목표에 따른 종합적인 보건의료자원 수급과 의료자원 확충 계획이 부재한 탓에 민간의료기관 중심의 병상 확충으로 시설은 과잉공급이지만 의료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의료의 질 향상과 환자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의사 공급은 의과대학 입원 정원으로 통제되고 있는 반면 병상 증설은 시장에 맡겨 자유롭게 이뤄지면서 정책간 부조화도 초래하고 있다.

이규식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염예교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건복지포럼> 4월호에 게재한 '의료계획의 수립과 쟁점'이란 글을 통해 "의료계획이 없으니 과도한 의료이용으로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며 "우리나라의 의료이용률이 외래에서는 세계1위, 입원에서는 세계 2위로 높게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의료보장제도를 운영하는 이상 정부나 보험자가 의료계획을 통해 필요도를 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공급계획을 마련하고 의료이용을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문재인 케어를 추진해도 기대했던 효과를 얻기 힘들다.

의료전달체계가 부재하고 지역간 의료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비급여의 전면급여화를 기반으로 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또다른 의료왜곡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환자쏠림이 심화되고, 중소병원과 동네의원 인프라가 붕괴될 것이란 부정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6월 19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제공: 보건복지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6월 19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제공: 보건복지부

복지부, 연말까지 의료계획 방안 도출...내년 보정심 통해 최종안 확정

이런 가운데 보건복지부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에 나서 관심이 모아진다.

복지부는 지난 19일 제1차 보정심 회의를 열고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른 제1차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에 나섰다. 보정심 회의는 지난 2005년 국무총리 주관으로 두 차례 개최된 후 이번에 13년 만에 개최된 것이다.

새로 구성된 보정심은 복지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7개 부처 차관급 공무원, 수요자와 공급자를 대표할 수 있는 위원과 보건의료정책 전문가를 포함한 총 20명의 위원이 참여한다.
 
복지부는 ▲범정부적 참여와 협력을 통해 평생국민건강관리 체계 구축 ▲보건의료정책 전반의 비전과 추진방향 제시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보건-복지 연계 전략 수립 등에 초점을 맞춰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새로 구성된 보정심은 복지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7개 부처 차관급 공무원, 수요자와 공급자를 대표할 수 있는 위원과 보건의료정책 전문가를 포함한 총 20명의 위원으로 구성했다.

복지부는 우선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위한 연구를 올 연말까지 진행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 연구' 공모를 냈다. 복지부는 연구과제로 ▲그간 추진해온 보건의료 주요 정책의 성과와 한계 평가․도출 ▲우리나라 보건의료 시스템이 지향해야 하는 국가 차원의 비전과 목표 ▲정책효과 및 수용성 등을 고려해 각 세부 정책과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 등을 제시했다.

기초연구 결과를 토대로 실무위원회 및 공청회 등 의견수렴을 거쳐 2019년 열리는 보정심 회원에서 최종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국무회의 심의를 통해 확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복지부는 "그동안 각종 보건의료 분야 여러 계획 전반을 조망하고 체계성과 연계성을 높이는 보다 큰 차원의 종합계획은 부재한 상황이었다"며 "보장성 강화와 지속가능한 보건의료 시스템 구축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보건의료 전체를 조망하는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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