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성(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

[라포르시안] 얼마 전 혈액관리위원회에 다시 복귀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시기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올라 여기저기 쫓겨났던 여러 위원회 중 하나이다. 혈액 분야는 제도와 내용을 아는 사람이나 단체가 없기에 법정위원회인 혈액관리위원회에서의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보건의료 분야의 각종 위원회가 대개 그렇지만 특히 혈액관리위원회처럼 전문가들로만 꽉 짜여진 위원회에서 나 같은 비전문가가 안건을 심의하고 어떤 경우에는 안건을 뒤집기도 하면서 제 역할을 하기란 사실 영 어려운 게 아니다.

지난달 열린 혈액관리위원회에는 전자헌혈증 도입 안이 심의안건으로 올라왔었다. 종이 형태의 헌혈증을 쓰다 보니 보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살다가 잃어버리게 될 때는 재발급이 안 되니 헌혈자의 불만이 높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에 헌혈자를 위해서라도 전자헌혈증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게 언뜻 보면 맞는 소리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날 앞장서서 이 안건을 부결시켜 버렸다.

헌혈증 제도가 헌혈 왜곡

헌혈은 그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는 행위다.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행위이니 헌혈자들은 고맙고 또 고마운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헌혈증을 받는 순간 헌혈은 헌혈이 아니라 혈액보관행위로 전락한다. 헌혈하면 어떤 혈액을 얼마나 채혈했는지 쓰여 있는 증서를 내준다. 바로 헌혈증이다. 이 헌혈증은 필요할 때 의료기관에 제출하면 그만큼의 혈액을 수혈 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혈액보관증이기도 하고 유가증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헌혈증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거의 우리나라가 유일할 듯 싶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지난 15년간 줄곧 헌혈증 제도의 폐지를 단체의 입장으로 가지고 있다. 이 제도를 유지하는 한 우리나라의 헌혈은 진정한 헌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 전자헌혈증을 도입하라고 어떤 의원이 이야기했는가보다.

전자헌혈증은 무엇인가? 전자카드를 만들어 헌혈기록을 집어넣어 보관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종이헌혈증을 발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다. 뭐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이 제도의 도입은 없애야 하는 헌혈증 제도를 더 영구히 강화하고 고착시키자는 안이다. 그래서 나는 혈액관리위원회의 심의 안건으로 올라온 이 안을 부결시킨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자헌혈증 안은 혈액관리위원회 산하 헌혈증진소위원회에서 논의하여 안으로 올라왔다. 그야말로 헌혈증진 안의 하나인 셈이다. 좀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헌혈증진을 이런 방식으로 하려고 하니 헌혈이 왜곡되고 증진이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원+원이라고? 헌혈자가 미끼 마케팅 대상인가?

요새 청소년들은 헌혈하면 그 대가로 영화티켓을 받는 게 당연한 줄 안다. 물론 사회는 정말 헌혈자들의 헌신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해줘야 하고 이에 대한 예우는 헌혈자의 자긍심과 가치를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장기기증의 시작인 이 헌혈기증 문화가 바로 서야 다른 장기기증 문화가 올바로 싹트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혈문화는 어떤가? 어렸을 때는 영화티켓을 받으며 해왔고 급기야 요새는 그것도 다른 혈액원과의 경쟁 때문인지 적십자사는 한술 더 떠서 원+원으로 영화티켓을 주며 헌혈자들을 꼬드기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이 군대에서는 빵하고 우유 먹으려고 헌혈을 하다가 제대하면 예비군 훈련장에서 훈련 빠지려고 헌혈을 하게 된다. 대가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물론 헌혈자의 대다수는 이타주의에 기반을 둔 숭고한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 헌혈을 경험하는 동기와 방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때 지금처럼 각각의 혈액원들이 채혈량을 늘리기 위해 이처럼 여느 기업처럼 미끼 마케팅을 하는 것은 분명코 아니다.

수혈용 혈액 부족? 의료기관의 혈액제제 오남용이 더 문제!

그렇다고 혈액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헌혈량은 10년 전 약 250만 유닛이었다. 연인원 약 250만명이 헌혈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정부는 이 혈액사업에 상당량의 돈을 투자해왔고 그중 하나가 헌혈의 집을 늘려나간 것이다. 이 결과로 10년 전 100여 개 정도였던 헌혈의 집이 지금은 약 150여 개로 불어났다. 헌혈 인구도 약 250만에서 현재는 300만 정도로 늘어났다.

그럼 여전히 수혈용 혈액은 모자랄까? 아니다. 오히려 넘쳐서 문제일 수도 있다. 이는 인구 7,000만 명의 영국이 한 해 200만 명 정도가 헌혈하지만 혈액공급 대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보다 적은 인구 5,000만 명에 일년 300만 명이 헌혈하는 우리나라는 당연히 남으면 남았지 이상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모자라면 안 된다. 오히려 의료기관에서 혈액을 오남용하는 것이 문제이면 문제일 것이다. <관련 기사: “피가 모자라…” 언제까지 헌혈권장 정책에 기댈 것인가>

상황이 이렇다면 지금은 전자헌혈증 도입을 논의할 게 아니라 헌혈증서 제도를 혈액사업의 한 방향으로 잡고 헌혈증을 없애면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헌혈률을 어떻게 홍보하며 인식을 개선하면서 헌혈을 헌혈답게 정상화할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노력은 아예 생각도 시작도 하지 않고 그저 해왔던 대로 군부대 동원하여 편하게 채혈하기 위해 전혈채혈이 금지된 말라리아 발생지역인 서울 이북 지역에서 11월부터 3월까지 한시적으로 채혈하겠다는 보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오는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헌혈률은 늘어났음에도 채혈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와 적십자사가 얼마나 안이하게 혈액사업을 하고 있는가를 방증한다.

이제는 헌혈증제도 폐지할 때

국민이 혈액을 나누는 행위에 동참하면 국가는 그만큼의 행위로 보답하는 것이 의무이고 예의다. 나는 지속해서 무상헌혈 무상수혈을 주장해 왔다. 수혈은 사고자나 수술 환자 그리고 각종 암환자 등의 급한 환자들이 주로 받는다. 대부분 환자가 본인부담금이 5%이거나 일반 환자라 하더라도 20%이다. 이 본인부담금을 다 합쳐도 일년에 200~300억 원이 안 된다. 많이 잡아서 300억 원이면 전 국민 무상수혈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가지고 있는 수십조 원의 보험료에 붙는 이자의 수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돈이다.

게다가 헌혈증 한 장당 붙어 있는 2,500원의 헌혈환부 예치금이 매년 70억 원 정도 쌓이고 지금 사용하지 않아서 쌓여 있는 돈도 300억 원이 넘는다. 그럼 나머지 200억 원 정도이면 전 국민이 무상으로 수혈받을 수 있다. 무상헌혈 무상수혈을 제도로 정착시키고 헌혈증을 폐지하라. 전 국민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세워야 할 올바른 장기기증 문화 정착을 위해 국가가 그 정도도 못하나?

강주성은?

1999년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후 골수이식으로 새 생명을 찾았다. 2001년 백혈병치료제 '글리벡' 약가인하투쟁을 주도했고, 한국백혈병환우회를 창립한 후 보건의료운동가들과 함께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를 만들어 적극적인 환자권리운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라는 책도 썼다. 현재 건강세상네크워크의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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