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엔젤로보틱스 이사)

[라포르시안] 지난달 19일부터 23일까지 부산에서 ‘IEC 의료로봇 국제표준 회의’(Internal Workshop on Medical Robots Standardization)가 열렸다. 필자는 IEC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옵서버(Observer)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의료로봇 분야 IEC 기준을 수립하는 이번 회의는 국내외 수술·재활로봇 전문가뿐 아니라 제품을 테스트하고 인허가를 관장하는 담당자들이 모여 새로운 규격 및 현재 적용되고 있는 기준 규격 개정을 논의했다. 

특히 자리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여러 국가와 기관 전문가들이 참석해 규격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한 명이 규격에 들어갈 내용을 제안하면 해당 내용에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본인의 경험과 근거 자료를 토대로 제안된 규격의 적용 여부를 자유롭게 토론했다. 토론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 자신이 속한 산업군의 이익, 자신의 속한 기업 또는 단체 이익을 반영하기 위한 치열함이 있었다. 

토론을 통해서는 규격에 적용될 한 단어·한 문장을 정의해 나갔다. 때로는 용어 정의를 위해 몇 시간을 논의하기도 하고, 쉼표는 어디에 찍을지, 규격이 제정·개정됐을 때 파장과 타 규격과의 연계성까지 고려한 다각적인 검토가 이뤄지며 하나의 규격이 어렵게 만들어졌다. 

이번 국제표준 회의는 단순히 IEC 규격을 만드는 것이 아닌 전 세계 전문가들이 자국 또는 자사에 유리한 내용을 규격에 적극 반영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특히 회의 주요 관심사를 살펴보면 첫째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정의’였다. 의료로봇은 오랜 역사를 가진 산업이 아닐뿐더러 로봇과 의료 관계자들이 협업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해당 로봇과 의료 관계자 모두가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만큼 용어 정의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다.

둘째 인공지능(AI)의 의료 환경 적용이었다. 의료로봇에는 아직 AI가 적용되는 부분이 많지 않으나 향후 모든 의료기기에 작든 크든 AI가 적용될 것이며, 이를 어떻게 의료로봇에 적용·평가할 것인지 관심이 지대했다. 이에 새롭게 제정된 ‘IEC 63521 ED1’(Machine Learning-enable Medical Device–Performance Evaluation Process)에도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AI 성능 평가를 위해 제시된 최초의 기준을 어떻게 의료로봇에 적용할지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셋째 IEC 60601-1 4판에 대한 관심이었다. IEC 60601-1 개정은 의료기기 관련 기준 규격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이슈인 만큼 개정된 부분과 개정 의도 등에 대한 세미나와 토론이 진행됐다. 더불어 각 그룹에서도 IEC 60601-1의 개정 의도를 개별 규격에 반영할 수 있도록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해외 관련 기관이 국제표준 회의를 지속적으로 참석한다는 점이었다. 수술 로봇의 경우 미국 FDA 관계자가 국제표준 회의를 모니터링 하기 위해 참석했고, 논의되는 내용에 대해서도 많은 질의와 의견을 제시했다. 이는 IEC 규격을 문구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개정된 규격 의도를 파악해 실질적인 인허가 심사에 적극 반영코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 로봇협회 관계자 역시 회의에 적극 참여하진 않았지만 자국에 불리한 내용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등 자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중국의 NMPA(국가약품감독관리국) 관계자는 자국에서 올해 고시 예정인 웨어러블 로봇 규격을 소개했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한국로봇산업협회·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 관계자들이 이번 회의에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의료로봇 인허가를 담당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담당자가 국제표준 회의에 참석해 IEC 규격 제·개정 취지를 이해하고 이를 제품 인허가에 적용하는 것은 물론 국내 산업에 불리한 내용이 있으면 식약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무적인 점은 이번 국제표준 회의 기간 식약처 담당 국장이 참석한 업체와의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식약처·학교·국립재활원 등 관련 기관들이 의료로봇 산업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고, 향후 식약처가 주도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기업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쉬웠다. 필자 역시 그간 국제표준 회의에 관심이 크지 않아 자주 참석하진 않았다. 이번 회의에 정식 멤버로 활동하는 인원 중 외국은 대부분이 기업 관계자인 반면 국내의 경우 대학교수들이 많았다. 외국 기업들은 국제표준이 본인이 종사하는 산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이해하고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회의 전 기업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이용해 교수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국제표준이 한 산업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을 기업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업이 의료로봇 산업 발전을 위해 국제표준 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와 자국 기업에 유리한 국제규격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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