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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료기술 모호한 '잠재가치'로 근거중심의학 흔들어[뉴스&뷰] 정부,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 도입...잠재성 평가로 '선진입-후평가'
"불특정 다수 환자 대상으로 무분별한 임상시험 하는 꼴"

[라포르시안] 지난 2007년 도입된 신의료기술평가 제도는 의학적으로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술로부터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신의료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나 의료기술이 임상현장에서 환자 치료에 사용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당연함이 어느 순간부터 혁신적인 의료기술의 발전과 임상현장 적용을 막는 걸림돌로 치부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는 규제 완화를 명분으로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신속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가 시장에 진입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따로따로 진행하던 의료기기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를 동시에 추진하는 '패스트 트랙'(Fast track) 도입에 공을 들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공공성이 강조되는 보건의료분야에 대한 규제완화를 통해 상업화를 촉진시키겠다는 것은 국민부담을 희생양 삼아 대기업 자본과 대형병원의 수익을 보장하겠다는 것으로 메르스 사태와 같은 국가적 재난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막상 정권이 바뀌니 정책을 추진하는 정체만 바뀌었을 뿐 벌이는 일은 똑같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이번 정권에서도 의료산업화 추진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걸림돌 취급이다.  

문재인 정부는 작년부터 '혁신성장 확산을 위한 의료기기 분야 규제혁신'을 명분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와 신속한 시장진입에 팔을 걷었다.

그 일환으로 보건복지부는 지난 15일자로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 도입 및 ‘신의료기술 평가기간 단축’ 등의 내용을 담은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공포·시행에 들어갔다.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의 대상은 3D 프린팅, 로봇, 이식형 장치, 가상·증강현실, 나노기술, 인공지능 등을 활용한 의료기술이다. 

이런 의료기술은 기존 문헌 평가와 더불어 새로 개발된 의료기술의 잠재성 평가를 통해 시장진입 여부를 결정한다. 잠재성 평가를 위한 심의는  ▲맞춤형 의료기술 ▲혁신 첨단시술 활용 ▲사회적 요구도가 높은 질환 ▲대체기술 부재 ▲환자 중심 기술 ▲의료결과 향상 등이다.

기존 평가체계에서 유효성을 평가할 문헌이 부족해 탈락했던 의료기술 중 환자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환자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등 높은 잠재성을 가졌으면 조기 시장 진입을 허용한다. 이렇게 의료현장에서 활용된 결과를 바탕으로 3~5년 후 재평가를 받도록 했다. 혁신의료기술을 '선 진입'토록 한 다음 '후 평가'를 하도록 했다.

무엇보다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은 신의료기술평가 제도의 근본적인 도입 취지를 훼손하는 정책이다.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신의료기술평가를 하는 것인데 먼저 임상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나중에 평가를 하겠다는 건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 평가에 소요되는 시간과 자원을 낭비로 본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표 출처: 개정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게다가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을 가려내는 심의기준도 상당히 모호하다. 개정된 신의료기술평가 규칙에 따르면 별도평가트랙 대상은 ▲환자만족도 향상이 기대되는 의료기술인가 ▲의료결과의 향상이 기대되는 의료기술인가 ▲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질환 등을 비롯한 재난적 질환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기술인가 등을 따져서 결정하도록 했다. 

이런 모호한 기준을 근거로 할 경우 해석하기에 따라 거의 모든 의료기술을 별도평가트랙 대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혁신의료기술의 잠재가치평가 기준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시민단체와 의료계에서는 의료기기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 통합심사에 따른 신의료기기의 신속한 시장진입이 부실한 평가 검증으로 이어질 경우 환자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첨단'으로 분류한 의료기기는 대부분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립되지 않은 ‘출현단계’의 의료기술로, 오히려 보다 엄격한 검증절차를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의료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제품이 속속 개발되고 있지만 임상진료 상황을 반영해 정확도를 검증한 경우는 극히 드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최근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박성호 교수팀이 대한영상의학회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KJR(Korean Journal of Radiology)' 3월호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작년 1~8월까지 전 세계에서 출간된 516편의 유관논문을 분석한 결과 의료용 AI의 정확도를 어떤 형태든 외부검증(external validation)으로 확인한 논문은 6%에 그쳤다.

의료용 AI의 정확도에 대해 제대로 된 임상검증과 엄격한 사전검증 절차가 필요한 이유는 신체와 건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AI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내린 진단오류는 환자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불필요한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박성호 교수는 "그동안 의료 AI의 임상적 정확도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영국의 의학계로부터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며 "정부도 의료 AI 산업의 진정한 육성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기술 개발 지원이나 규제의 완화, 신속한 허가와 같은 직접적 사업화 지원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제대로 된 임상검증을 촉진·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술에 '혁신'이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안전과 효과가 기존에 비해 월등히 향상된 것이 ‘혁신’인데 안전과 효과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기술을 통과시키면서 혁신성 운운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며 "임상적 근거 부족으로 오진 등 치료결과에 미치는 잠재적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의료기술을 별도평가트랙을 통해 임상현장에 확산하고, 임상현장에서 활용된 결과를 바탕으로 재평가를 하겠다는 발상은 불특정 다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무분별한 임상시험을 자행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난했다.

운동본부는 "혁신의료기술 별도트랙마련은 ‘근거중심의 보건의료기술 확산’이라는 신의료기술평가 고유의 가치체계를 흔드는 것"이라며 "기존의 정상적인 신의료기술평가를 거친 근거가 확립된 의료기술이 오히려 ‘잠재가치’나 ‘혁신’이라는 기준을 적용한 모호한 기술의 도입 때문에 상대적으로 환자 적용에 제약이 발생할 수 있고, 임상적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은 의료기술이 우선적으로 환자에게 적용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모순과 의료현장의 혼란을 초래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미 FDA, 신속승인 규제 강화 추진

한편 우리나라에서 의료기기의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장진입 시기를 앞당기는 쪽으로 규제완화에 골몰하고 있지만 미국의 사정은 다르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국(FDA)은 1976년부터 운영해온 의료기기의 신속 승인절차인 ‘510(k) 승인 프로그램’의 전면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승인 프로그램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아니라 수십 년 된 기존 제품과 비슷한 안전성과 효능을 갖추면 의료기기 제조업체가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해왔다.

FDA는 510(k) 승인절차를 통해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아니라 수십 년 된 기존 제품과 비슷한 안전성과 효능을 갖추면 의료기기 제조업체가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해왔다. FDA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승인한 의료기기의 82%가 510(k) 승인절차를 거쳐 시장에 진입했다.

그러나 510(k) 승인 프로그램을 거쳐 출시된 의료기기 제품 중 장비 결함으로 환자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특히 새로운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출시된 지 오래된 기존 제품과의 동질성을 입증한다는 건 주요한 논란거리였다.

FDA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510(k) 승인절차에 최신의 안전성과 유효성 기준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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