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위험의 외주화’는 왜 멈추지 않는가?

[라포르시안] 소식은 이미 널리 퍼졌으나,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김용균이라는 스물네 살의 젊은이. 그가 하청노동자이고 온갖 나쁜 조건에서 일하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했다는 것. 처음이지만 또 처음이 아니니, 시대적 징후로서 또 한 젊은이가 죽음을 보탰다.

많은 사람이 2년 반 전의 구의역 사고를 기억해 냈지만,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으나, 강릉 KTX 열차 탈선과 서울 아현동의 KT 화재 또한 같은 ‘구조’에서 생긴 일이 아닌가. 굵직한 것이 그럴 뿐, 작은(?) 사고는 한도 끝도 없을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사고가 아니다. 이미 그 구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유명 포탈에서 ‘위험의 외주화’는 자동 완성이 될 정도로 유명한(?) 검색어가 되었다. 이 시대의 지식으로 정립된 것을 넘어, 삶과 문화 속에 뿌리를 내렸다 해도 좋을 정도다.

잊을 만한 틈도 없이 위험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말하는 상황. 오늘날 한국에서 위험을 끝까지 떠넘긴 결과, 그 증언은 거칠고 참혹하다. 생명을 다치지 않으면, 때로는 죽음이 아니면, 조심조심 건네는 말은 물론이고 소리 높인 증언조차 거들떠보지 않는다. 오죽하면 국가인권위원장까지 나서서 정부와 국회 탓을 할까.

“정부와 국회는 법·제도적 보완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유해·위험 상시적 업무의 사내하도급 전면 금지, 원청의 책임 강화, 고용노동부 장관의 도급 인가대상 확대 등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논의가 조속히 재개돼 입법화되기를 기대한다.”

답답한 마음 끝에 걸린 우리의 관심은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거니와 낙관하기는 어렵다. 법과 제도 논의는 그나마 최소한을 말하는데도, ‘힘’ 있는 쪽의 압력 때문인지 언제 어떻게 결말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어느 쪽이든,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비관 또는 걱정.

법과 제도를 제법 고친다고 하더라도, 다시 얼마나 지킬 것인가 하는 실행과 집행의 문제가 남는다. 이런 일일수록 이 과정에서 법과 제도가 무력해지기 쉽다. 비용(돈)은 가깝고 가치(생명과 안전)는 멀리 있는 일들. 느슨한 강제와 공권력은 끈질기고 치밀한 돈과 이윤의 욕망을 이기기 어렵다.

위험과 이에 대한 태도가 구조 속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 때문에 더 비관적이다. ‘비용-효율성-이익-성과’의 자본주의 시장 구조는 발전소, KTX, KT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가 된 지 오래, 당사자들에게는 자신을 움직이는 원리인지조차 모른 채 본능처럼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구조 속에서 원청 기업과 자본의 위험은 노동자의 위험과 다르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내려가는 것이며, 그 때문에 경영자와 경영 능력이 의심받는 것이다. 노동자의 위험은 단지 이 위험 속에서만 보인다.

정부가 경영평가를 하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능력과 열성과 성실은 오로지 시장적 성과로 평가되고, ‘사회적 가치’와 같은 다른 잣대는 모호하거나 기껏해야 ‘측정 불능’의 구호에 머문다. 공사를 막론하고, 회장과 사장과 대표이사가 시장 성과 말고 자신의 가치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런 구조인 한, 노동자에게 위험한 일을 외주로 돌리는 것은 기업에는 다른 의미에서 위험을 관리하는 기술이고 방법이다. 수익과 경영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위험을 경계 바깥으로 떠넘기는 이중적 위험 회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위험 관리.

경제 논리보다 ‘외주화’의 정치 또는 그 의미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책무성’에서 면제되려 하는 것이 ‘갑’이 의도하는 외주화(공공부문에서는 민영화)의 핵심 정치다. 어떤 업무(예를 들어 소비자 상담)를 외주로 처리하면, 책임과 책무성, 즉 일에 대한 불만과 책임 추궁, 사회적 가치 판단은 오로지 외주로 향한다.

여기서 계약 대상과 조건을 정하고 사실상 외주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청과 외주를 책임지는 권력은 시장을 만들고 정책과 사업, 서비스를 상품화하지만, 정치적 책임에서는 면제되는 것이다.

이런 경제와 정치 구조, 거기서 연유하는 행동의 원리와 법칙성을 그대로 두고는 비슷한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개별 기업이나 그 운영자, 하청업체와 책임자, 사업장을 어떻게 한다고 나아질 차원이 아니다.

구조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 체제에는 한국 사회와 그 구조에서 결코 ‘탈주’하지 못하는 구성원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개인이 다짐하고 결단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윤리와 도적 문제를 넘은 지 오래다.

결국 머물러 있는 채 이겨내야 하는 모순적 과제다. 체제를 빼고는 당분간 유일하게 남은 길은 욕망과 의도의 경계를 정하고 이를 사회화, 제도화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수익을 남기고 싶어도, 죄를 짓거나 도덕을 배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정하는 것. 민주적 공공성에 기초한 국가권력 또는 사회권력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한계를 모르지 않으나 법과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미 논의되는 일 가운데도 입법 과제가 있으니, 우리는 각종 형태의 비정규 고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과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원청이 져야 할 책임 정도는 밝혀 말해둘 필요가 있다. 기준은 간단한 원리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니, 무분별한 하청과 외주가 경영에서 정치·경제적 위험을 불러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여러 방법 중에서는 이미 상당한 논의가 축적된 ‘기업살인법’이 유력 대안 가운데 하나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 관련 링크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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