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안전성 논란에 ‘510(k)' 승인절차 손질 추진...일부 이식형 장치 510(k) 대상서 제외 검토
복지부, 혁신·첨단의료기기가 시장진입 단축 추진..."환자안전 크게 위협" 우려 커져

[라포르시안] 미국 식품의약품안전국(FDA)이 1976년부터 운영해온 의료기기의 신속 승인절차인 ‘510(k) 승인 프로그램’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년 동안 FDA에 보고된 의료기기 결함 등으로 인한 피해 사례가 170만 건에 달했고, 이로 인해 약 8만3,000명이 사망했다는 비영리 탐사보도 전문기관인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관련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이다.<뉴스타파 관련 기사 바로 가기>

FDA는 지난 26일(미국 현지시각) 새로운 의료기기에 대해서 최신의 안전성 및 효능을 반영하도록 510(k) 승인 프로그램을 전면 개편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FDA 보도자료 바로 가기>

기존 승인 프로그램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아니라 수십 년 된 기존 제품과 비슷한 안전성과 효능을 갖추면 의료기기 제조업체가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해왔다.

현재 미국에서는 상당수 의료기기가 510(k) 승인절차를 거쳐 시장에 나온다. FDA에서 의료기기 인허가 절차를 총과하는 CDRH(의료기기·방사선 보건센터)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FDA가 승인한 의료기기의 82%가 510(k) 승인절차를 통과했다.

그러나 510(k) 승인 프로그램을 거쳐 출시된 의료기기 제품 중 장비의 결함으로 환자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하는 등 앞서부터 이 규정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특히 새로운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출시된지 오래된 기존 제품과의 동질성을 입증한다는 건 주요한 논란거리였다.

다큐멘터리 <칼날 위에 서다: 첨단 의학의 덫> 화면 갈무리.
다큐멘터리 <칼날 위에 서다: 첨단 의학의 덫> 화면 갈무리.

미국 의료기기 허가제도의 문제를 파헤친 다큐멘터리 <칼날 위에 서다: 첨단 의학의 덫>에는 510(k) 승인절차를 거쳐 FDA 허가를 받은 다빈치 로봇장비를 이용해 수술을 받은 후 심각한 부작용을 겪는 환자들의 사례가 적지 않게 나온다.

지속적인 문제 제기와 ICIJ의 탐사보도가 이어진 가운데 FDA가 510(k) 승인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FDA는 이미 앞서부터 의료기기 인허가 절차를 개선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 4월에 '의료기기 안전 조치 계획'(5-pronged Medical Device Safety Action Plan)을 발표하고 의견수렴에 들어갔다. 이 계획에는 510(k) 승인절차에 최신의 안전성과 유효성 기준을 적용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이번에 FDA가 발표한 510(k) 전면 개편 방안은 여기에 기반해 마련한 것이다.

FDA에 따르면 관련 제도가 전면 개편되면 앞으로 질 삽입형 의료기기를 비롯해 체외형 자동 제세동기, 고관절 임플란트 등의 일부 인체이식형 장비는 510(k) 승인절차를 통해서는 시장에 출시할 수 없게 된다.   

스캇 고틀립(Scott Gottlieb) FDA 위원장은 "오래된 기준에 근거해 승인을 받은 의료기기가 안전하지 않더거나, 이런 장비를 시장에서 제거해야 한다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제조업체들에게 보다 최신의 기준을 적용하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환자안전을 위해서 모든 의료기기 장치가 이익과 위험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러한 위험을 최소화 하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의료기기 분야 규제혁신 정책 마련...‘선 진입 - 후 평가’ 도입

한편 FDA가 의료기기의 신속 승인절차 개편을 추진하는 것과 반대로 국내에서는 의료기기 분야에서 규제개혁의 일환으로 시장진입 시기를 앞당기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에 '혁신성장 확산을 위한 의료기기 분야 규제혁신 및 산업육성 방안'을 발표했다. 복지부가 발표한 규제혁신 방안의 핵심 중 하나는 안전성 우려가 적은 의료기술(의료기기)은 ‘선 진입 - 후 평가’방식의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체외진단검사 분야의 신의료기술평가는 사전평가에서 사후평가로 전환하고, 체외진단기기의 시장진입에 소요되는 기간을 기존 390일에서 ‘80일 이내’로 대폭 단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인공지능(AI), 3D 프린팅, 로봇 등을 활용한 미래유망 혁신·첨단의료기술이 최소한의 안전성이 확보된 경우 우선 시장진입을 허용한 후, 임상현장에서 3~5년간 사용한 후 축적된 임상 근거를 바탕으로 재평가를 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혁신·첨단의료기술의 조기 시장 진입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개발이력이 짧고 연구결과가 부족해 신의료기술평가에서 탈락하던 혁신·첨단 의료기술을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개발과 동시에 신속하게 허가되도록 하는 ‘신속허가 가이드라인’을 구축하고, 별도 평가트랙을 운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처럼 의료기기의 신속 승인절차를 도입하는 정책 방향이 환자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게다가 이 같은 규제혁신 방안은 앞서 박근혜 정부 때도 투자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내용이다.

시민단체와 의료계에서는 의료기기 허가와 신의료기술평가 통합심사에 따른 신의료기기의 신속한 시장진입이 부실한 평가 검증으로 이어질 경우 환자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첨단'으로 분류한 의료기기는 대부분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립되지 않은 ‘출현단계’의 의료기술로, 오히려 보다 엄격한 검증절차를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신의료기술평가를 사전에서 사후평가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체외진단기기의 경우 안전성과 유효성 문제로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제출한 ‘2016년 이후 체외진단의료기기에 대한 신의료기술평가 현황’ 자료에 따르면 신의료기술평가를 신청한 체외진단의료기기 229건 중 42.3%(97건)만 평가를 통과했다. 50건(21.8%)은 유효성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기엔 연구결과가 부족해 평가를 통과하지 못했다. 나머지 35.9%는 평가 진행 중 신청을 취하하거나 반려한 것으로 파악됐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의료기기나 의약품에 대한 규제는 그 자체로 사전 규제가 아닌 이상 그 의미가 없다"며 "정부가 주장하는 ‘사후 규제’란 이미 누군가의 건강이나 생명에 위해가 발생한 이후라는 말로,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가 박근혜가 말하던 '모든 규제를 물에 빠뜨려 필요한 규제만 살리겠다'고 한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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