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법 수차례 개정으로 ‘외국인 전용 병원’서 사실상 ‘국내 영리병원’으로 둔갑

[라포르시안] 중국 기업이 제주특별자치도에 국내 첫 외국영리병원(녹지국제병원) 설립계획서를 제출한 지 8개월 만에 보건복지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예정대로라면 중국 녹지그룹이 투자해 설립하는 '녹지국제병원'은 오는 2017년 3월 문을 열게 된다.

녹지국제병원은 제주도를 관광하는 중국인을 상대로 피부관리, 미용성형, 건강검진 등의 시술을 하며, 내국인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도 있다. 다만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을 뿐이다.

녹지국제병원은 '제주특별자치도 보건의료 특례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재외국민 또는 외국인 환자를 소개·알선 및 유치할 수 있고, 의료법에 정해진 부대사업 외에도 ▲여행업 ▲관광숙박업 ▲목욕장업 ▲세탁업 ▲관광객 이용시설업 ▲국제회의업 ▲학원 등을 운영할 수도 있다.

복지부는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승인하면서 "내국인의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병상 규모·의료인·지리적 제한(제주도) 등을 감안할 때 국내 보건의료체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럴까.

녹지국제병원이 제주도에 국한되고, 그 규모도 50병상에 못미치는 작은 외국영리병원이기 때문에 국내 의료체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것이란 복지부의 전망은 사실일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녹지국제병원 설립 승인을 계기로 다른 경제자유구역의 외국영리병원 설립 추진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며, 외국영리병원이 국내 의료생태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이 높다. 

가장 큰 이유는 외국영리병원 설립에 관한 규제 완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된 탓에 이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영리병원인지, 내국인을 상대로 하는 국내 영리병원인지 구분조차 모호한 지경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제정된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한 정주환경 조성 차원에서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설립 규정을 담아냈다.

당초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은 외국인이 투자해서 설립하고 외국인만 진료할 수 있는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의 목적으로 계획됐다.

그러다 2005년 법개정을 통해  '외국인 전용'이란 용도는 폐기되고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는 '외국 의료기관'으로 바뀌었다.

외국인만 설립할 수 있도록 한 규제도 완화됐다. 2006년 6월 법개정을 통해 외국인과 국내 법인간 합작을 통해서도 외국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이듬해에는 외국인이 의료업을 목적으로 설립한 상법 상 법인도 설립이 가능하도록 설립주체의 허용 범위를 확대했다. 

게다가 올해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개정된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의료기관의 개설허가절차 등에 관한 규칙'에 따라 외국인 의사면허 소지자를 최소 10% 이상 고용해야 하는 규제도 없앴다.

지속적으로 이뤄진 규제 완화 때문에 지금은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영리병원'인지 '경제자유구역 내 국내 영리병원'인지 그 경계마저 모호해졌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에 설립되는 '외국영리병원'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남은 규제는 '외국인 투자비율 50% 이상, 해외 소재 병원과 운영협약 체결' 사항 뿐이다.

초기에 경제자유구역에 외국인이 설립한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이란 타이틀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나마 지금 남아 있는 '외국인 투자비율 50% 이상'이란 규제도 얼마든지 회피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보건의료노조는 "현행 외국인 투자비율 50% 이상 규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국내 자본들이 사모펀드 등 투기자본을 통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접근이 가능한 것"이라며 "말 그대로 외국영리병원 도입은 이제 국내영리병원 도입과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제주도 외국영리병원 허용이 경제자유구역을 시작으로 한 국내 영리병원 허용의 물꼬를 틔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녹지국제병원 설립 허용으로 전국 경제자유구역 8 곳과 제주도에 설립 가능한 영리병원이 이제 물꼬를 틀며 우후죽순 들어선다면 한국의 공공의료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며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고 무규제의 상업적 의료가 횡행할 영리병원은 국내 의료를 상업화로 잠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관련 사설 인터넷판 화면 갈무리.

"국내 병원 역차별 없어야" 벌써 여론 조성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주도 외국영리병원 설립 허용을 계기로 '국내 병원 역차별' 여론이 조성되고, 이에 따라 국내 영리병원 설립 허용을 요구하는 여론이 조성될 것이란 점이다.이미 조선일보는 지난 19일자 사설(13년 만에 외국 영리병원 첫 허용, 국내 병원 역차별 없어야)을 통해 녹지국제병원 승인과 국내 병원 역차별 우려를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보건·의료 분야는 우리가 어느 나라 못지않게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가 의료 민영화 반대라는 허울뿐인 이념에 매달려 반대하는 바람에 신규 투자가 꽉 막혀 있다"며 "무엇보다 외국계에는 영리병원을 허용하면서 국내 병원에 허용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국내 자본만으로도 영리병원 설립이 가능토록 해야 한다"는 국내 병원계의 입장이나 다름없다. 녹지국제병원이 본격적으로 설립·운영되면 '국내 병원 역차별'론은 더욱 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소장 김창엽)는 이번주 서리풀 논평을 통해 녹지국제병원 설립 승인이 국내에 영리병원 설립 물꼬를 틔우고, '국내 병원 역차별' 여론을 조성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이런 물꼬 효과에 힘을 보태는 것이 엉뚱한 형평성 논리다. 어떤 한 장소에 영리병원이 허용되고 운영되면, 수많은 ‘상대적 박탈’이 반드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영리병원에 허용한 그 모든 유리한 것들은 독점될 수 없다. 이어서 반드시 내국인 ‘역차별’ 논리가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영리병원도 형평성을 주장할 수 있다. 다른 의료기관과 마찬가지로 국민건강보험 환자를 보고 진료비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 건강보험 없이 치료할 수 있는 환자가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이 정부가 단지 4층 동네 병원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관료가 합작해서 한국 보건의료 전체를 흔들겠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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