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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산재 소송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판결의 가벼움’

[라포르시안] 지난 2010년,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던 중 임신한 간호사 여러 명이 한꺼번에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다. 당시 임신한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자연유산을 했고, 또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했다. 이 일은 '병원 괴담'으로 불릴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논란이 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제주의료원 노조에서 병원 측에 잇단 유산과 선천성 심장질환 신생아 출산에 대한 역학조사를 요구했고, 노사 합의가 이뤄져 2012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2012년 2월 발표한 ‘제주의료원 간호사의 유산 및 신생아 선천성 심장질환과 업무연관성 유무 파악을 위한 역학조사’에 따르면 2009년 당시 전국 평균 유산율이 20.3%인데 반해 제주의료원 간호사의 유산율은 40%에 달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원인은 병원 내 인력부족으로 인한 높은 업무 강도와 열악한 근무환경 때문이었다.

제주의료원은 경영난을 이유로 인력감축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간호사들은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렸다. 임신한 간호사가 무리한 교대근무와 야간노동에 시달렸고, 심지어 간호사가 조제업무까지 맡아 약품 분쇄 작업을 하던 중 인체에 유해한 약품 가루에 노출되기도 했다.

이런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4명의 제주의료원 간호사가 2012년 12월 "임신중 과중한 업무강도와 고용 불안정으로 인한 스트레스, 임신부와 태아에게 유해한 약품 취급 등으로 태아의 건강손상을 일으켰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비 지급 신청을 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아이는 산재법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고, 초진소견서 미제출 등의 이유를 들어 요양비 지급 신청을 거부했다.  

1심 재판부 “엄마와 태아는 한몸…임신 중 간호사 업무 따른 태아 건강손상도 산재”2심 재판부 “출산으로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면 선천적 질병은 출산아가 지닌 것”

4명의 간호사는 다시 2013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재차 거부당했다. 결국 이들은 2014년 2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요양급여신청 반려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13년 6월 제주의료원 간호사 유산 사태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역학조사를 근거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임신 초기 3교대 근무, 의료원 경영문제로 인한 임금 미지급과 고용불안 등의 스트레스, 임산부에게 유해한 약품 분진에 노출된 점 등을 이유로 간호사들의 자연유산이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관련 기사: 산업안전보건연, 제주의료원 ‘집단 유산’ 역학조사 실시

법원은 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 보고서를 증거로 채택했고, 2014년 12월 "여성근로자의 임신 중 업무로 인해 태아에게 건강손상이 발생했다면 이는 근로자에게 발생한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또 "임신 중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이므로 임신중 업무에 기인해 태아에게 발생한 건강손상은 산재보험법상 임신한 근로자에게 발생한 업무상 재해로 봐야한다"며 "출산 전후를 불문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요양급여를 제한없이 지급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의 1심 판결에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했고 지난 5월 서울고법 행정11부는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 이유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항소심 재판부는 "산재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 본인에 한정된다"며 "출산으로 어머니와 아이가 분리되는 이상 선천적 질병은 출산아가 지닌 것으로 업무상 재해도 아이에 대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임신 중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이기 때문에 임신 중 업무로 인해 태아에게 발생한 건강손상이 산재보험법상 임신한 근로자에게 발생한 업무상 재해로 봐야한다는 1심 법원의 판단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더 기가막힌 건 출산 이후에는 산재급여 수급권이 원고인 어머니가 아니라 자녀에게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선천성 심장기형에 대해서 산재급여를 인정받으려면 당사자인 아이들의 이름으로 요양비 지급을 청구하라는 취지다.

맹목적 법 논리에 빠진 형식적인 해석

이에 대해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의 조영관 변호사는 '참을 수 없는 판결의 가벼움'이라고 꼬집었다. <관련 글 바로가기>

조 변호사는 지난 20일자로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홈페이지에 게재한 '참을 수 없는 판결의 가벼움 : 신생아에게 직접 산재보험을 청구하라는 법원'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엄마 뱃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는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던 질병이, 살아서 태어난 이후에는 독립된 법인격체인 신생아의 선천성 질병으로 바뀐다는 해석도 기괴하고 소름이 돋는다"며 "산재보험의 수급권이 신생아에게 있을 뿐 근로자인 산모에게 없으니 청구를 기각한다는 대목에서는 그 논리의 가벼움에 부끄러워 더 이상 읽을 수가 없다"고 지탄했다.

조 변호사는 "태아가 산재보험을 청구하면 근로자가 아니라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할 텐데. 앞으로 임신한 여성노동자는 출산을 앞두고 태아의 이름으로 산재보험에 가입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가"라며 "선천성 질환이라는 상처를 온몸으로 껴안고 태어난 것이 무슨 잘못이기에 공적인 보호를 배제하겠다는 것인가. 산재보험 제도가 정말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적보험제도 상의 중대한 제도적 불비이고 입법의 흠결이라는 문제도 지적했다.

조 변호사는 "모성보호와 여성근로에 대한 특별한 보호를 천명하고 있는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기 위해 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임신 중인 여성근로자에 대한 내용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며 "생식보건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능히 예상할 수 있는 ‘안전보건상의 위험’에 해당함에도,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는 그 위험에 적절히 대비하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법원이 산재보험제도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법의 논리에 빠져 형식적인 해석을 하는 누를 범했다는 것이다.

1977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여성 노동자가 임신 중 업무로 인해 태아에게 건강손상이 발생해 선천성 장애아가 출생한 사건에서 "선천성 장애아를 산재보험급여 지급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독일기본법 제20조 제1항의 사회국가원리를 구현함에 있어서 ‘본성상 단일체’(natürliche Einheit)인 임신한 여성근로자와 태아를 합리적 근거 없이 차별하는 것이어서 독일기본법 제3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므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위헌결정 사례도 들었다.

조 변호사는 "독일 입법부는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를 반영해 '업무상 질병의 경우 일반적으로 모에게 업무상 질병을 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유해요소로 인해 태아에게 건강손상이 발생했다면 (비록 모에게는 업무상 질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보험사고로 본다'고 규정했다"며 "동일하게 임신한 여성 노동자의 업무에 따른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40년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두 나라 법원이 보여준 상반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고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에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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