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필수의료 위기는 시장 중심 의료공급 구조에서 비롯
정부, 공공의료 확충 없이 시장화 중심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 추진

[라포르시안]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 미달 사태, 지역.필수의료 위기, 의과대학 입학정원 2000명 증원 등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추진, 전공의 집단 사직, 수련병원 의료공백 사태 장기화, 의과대학 교수 사직 동참... 

지난 2월 말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집단으로 병원을 떠난 이후 대한민국 의료체계가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한 편에선 오래전부터 위기신호가 울렸지만 듣지 못하거나 못 들은 척하다가 의대 증원 추진과 함께 더는 숨길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는 시각도 있다. 

의대 정원 확대로 촉발된 전공의 집단사직과 그로 인해 발생한 대학병원의 의료공백, 의료계와 정부 간 갈등 지속.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보면 정부가 내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의사집단이 반발하는 상황으로 단순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의정 갈등과 그에 따른 의료공백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한국 의료체계에 누적된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문제점 진단과 해결 방안이 틀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역의료와 필수진료과 공백 문제의 근본 원인인 시장 중심 의료공급 구조로는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장의 작동원리가 효율적인 의료자원 배분을 가져오지 못한 '시장의 실패'로 발생한 지역.필수의료 문제를 시장원리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이다.  

건강과대안,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의료연대본부는 지난 26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칼날 위에 선 한국의료, 개혁 과제와 대안’ 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 첫 번째 발제자로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이상윤 책임연구위원이 나섰다. 이 책임연구위원은 한국 의료시스템이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의료 공백, 혼란, 갈등은 서막일 뿐이며,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대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사집단 간 대립을 '허구적 대립'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문제는 지역 간, 진료과 간, 의료기관 간 접근성과 형평성에 있다고 봤다. 

이상윤 연구위원은 "시장에 의료 규제를 맡기는 방식은 실패했으며, 강력하고 유능한 정부가 의료 시스템에 개입해야 한다"며 "정부가 의료 서비스의 계획과 배분을 책임지고 의료 규제를 강화하며, 의료기관 간 역할 분담 및 환자 배분을 통해 형평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시스템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의대 교육 혁신: 전적으로 다른 체계의 의과대학 교육 틀을 고민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전공의 수련에만 충실하도록 하고, 일부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공의 임금 제3자 지불 방식도 고려할 필요 ▲의료기관 내 의사들의 권력 독점 체계를 허물고 의료 직업 간 평등한 협업 체계 구축 등을 제안했다. 

그는 "한국사회가 여러 지표를 보면 과도하게 의료화돼 있다. 사회가 의료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며 "의료 권력에 사회적 결정을 위임하는 행태를 지양하고, 과도한 의료화를 줄이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현정희 서울대병원노동조합 정책위원장은 장기화되는 전공의 집단 진료 거부로 병동 폐쇄 및 진료 축소가 발생하고, 그 고통과 책임이 환자와 병원에 남아있는 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책위원장은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 발표는 개문발차 식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급격한 증원안을 발표를 하면서 전공의 파업을 유도한 측면이 있다"며 "구조적 문제 해결을 방치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없다"고 했다.

내년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한다고 '소아과 오픈런'이나 '응급실 뺑뺑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 정책위원장은 "정부는 의료대란에 대응한다면서 전공의 업무를 대체할 진료지원인력, 즉 PA 간호사 합법화에 나서겠다고 했으나 지난 10년 동안 PA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도 없고 제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었다"며 "심지어 어떤 때는 정부가 나서 PA는 불법이기 때문에 근절하겠다고 했다가 지금은 시범사업이라고 얼버무리며 대충 역할을 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 문제의 진실은 인건비가 많이 드는 의사의 일을 인건비가 덜 드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왔던 것이 본질이었다"며 "간호사들은 책임과 권한 보장도 없이 의사의 일을 넘겨받아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고 매우 불안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의료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벌어진 의료대란 위기는 시장 민간의료 중심의 의료공급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 정책위원장은 "그동안 의료공급과 관리를 시장과 민간에 맡기고, 병원은 수련을 하라고 맡겨진 전공의를 돈벌이에 이용한 것이 핵심 문제"라며 "정부의 잘못된 보건의료 정책과 의료인력 정책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전공의들을 겁박하고 의사와 시민을 갈라치기해서 쳐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더 우려스러운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공공의료이고 의료 공공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왜 지역 의료와 필수의료가 무너졌고 그것을 책임질 의사가 왜 없었느냐에 대한 원인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 정부가 공공의료를 성장시키지 못하고 의료를 시장에 내맡겼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자문위원장은 공공의료 확충과 늘어나는 의사를 지역에 배치할 수 있는 정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의대 증원은 지역·필수의료 살리기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석균 정책자문위원장은 "공공의료 확충 없이는 취약의료지에 5000명의 의사를 보낸다는 윤석열 정부의 원래 의대증원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고, 지역에 의사를 배치하는 공공의사제도나 지역의사제도 즉 의무복무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아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특히 이번에 의대 증원분 2000명 중에서 ‘무늬만 지역의대’에 배정된 인원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도권 대형병원을 교육병원으로 하고 있는 비수도권 의대 출신 의사들이 지역의료에 근무하지 않고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옮겨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확정한 의대 증원분 배정에서 국립대학교 인원을 제외한 사립대 증원 인원 1,194명 중 수도권에 교육병원이 있는 지역 사립대 증원분이 764명(64%)이다. 특히 울산대(서울아산병원) 성균관대(삼성서울병원)는 기존 의대 정원이 40명에서 내년부터 120명으로 늘어난다. 

우 정책자문위원장은 "‘무늬만 지역의대’인 서울 및 수도권에 수련병원이 있는 울산대, 성균관대 등의 의대 증원이 사립의대의 64%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지역의료나 필수의료를 위한 의대증원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는 "윤석열정부가 필수의료 패키지가 의료개혁인 듯 말하고 있으나 민간병원이 수익이 남지 않아 현실적으로 의료취약지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인 공공의료의 확충방안이 없어 지역의료격차의 해소방안이 될 수 없다"며 "지역이나 필수의료 수가인상으로 비급여 인기과에 준하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만 아니라 혹시 성사된다면 재정낭비뿐 아니라 의료비 본인부담 인상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우석균 자문위원장은 진정한 의료개혁의 대안으로 공공의료 대폭 확충을 제시하고, 그 규모를 (필수의료 패키지에서 제시한) 5년동안 전국 70개 중진료권당 2~3개 지역병원을 네트워크화하는 방안을 공공병원으로 설립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군구당 1개 정도 지역공공병원을 지어도 875개 현립의료원 등이 있는 일본의 1/2수준"이라며 "21세기 공공병원은 필수진료 및 표준진료에 더해 새로운 2차 공중보건사업 즉 노인 돌봄지원, 장애인 진료 및 재활 지원, 여성 친화적 및 성폭력 피해지원, 재난 및 감염병 대응 등 새로운 지역 공공보건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발제에 이어 진행한 지정 토론에서는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간호사에게 인력공백에 따른 업무부담이 떠념지고, 환자 피해도 커지고 있지만 정부가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정 토론자로 나선 박경득 공공노조 의료연대본부 본부장은 "병원 노동자들은 병원의 비상경영이라는 엄포 아래 간병인 등이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며 "환자와 병원 노동자의 피해는 모두 정부 정책의 이행 과정의 실패로 인한 피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정부는 이러한 피해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 정책 이행 과정의 실패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손실은 정부가 책임져야  하며, 시민을 구경꾼이나 의사와 정부 편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을 이용해선 안된다"며 "공공의료인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의료개혁이 이뤄져야 반복되는 의사와 정부만의 의료정책 결정과정의 비민주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세가와 사오리 인하대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전임연구원은 일본의 의사 증원과 공공의료 확충 사례를 소개했다. 

하세가와 사오리 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공공의료 강화 대책과 의사 증원 논의가 함께 진행됐으며, 전체 의료기관에서 차지하는 공공병원 비율이 한국보다 4배 더 많다. 

하세가와 사오리 연구원은 "일본 정부는 국공립대병원을 통해 도심 밖에 지역에서의 의사 부족이나 수도권 편재를 해소하기 위해 의료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 주기적으로 의사를 파견하는 정책을 세워오고 있다"며 "일본에서는 지역 자치의대도 의사 부족이 심각하거나 의료가 취약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혼합진료금지로 비급여가 제한되는 일본의 계보험 정책도 의사들에 대한 시민의 신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비급여와 행위별수가제에 기인하는 한국의료체계의 변화도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정형준 인의협 사무처장은 전공의파업으로 촉발된 보건위기 상황에서도 윤석열정부가 공공의료를 외면하고, 일차의료체계에 대한 고민도 없는 총선정책을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공백 위기를 핑계로 비대면진료를 전면 허용하고, 여당의 총선 공약으로 '스마트 이동병원', '약배송', 개인건강정보 집적화를 추진하는 의료민영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전공의 집단행동에 따른 의료공백을 최소화한다는 명분으로 상급종합병원의 중증환자 진료체계 유지와 경증환자 회송 보상 등에 매월 1882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지원하는 방안도 문제삼았다. 

정 사무처장은 "대형병원 손실 충원을 위해 매달 건강보험재정을 1882억원 이상 집행하는데, 이 금액이면 훌륭한 공공병원을 매달 하나씩 건립할 수 있고, 매달 1000여명의 국가장학제도 하에 지역의사를 양성할 수 있다"며 "윤석열정부가 말로는 지역의료를 말하면서도 지난 50여일간 한 행동은 수도권대형병원 살리기로 일관하고 있고, 최근 밝힌 학생배치방안도 수도권쏠림의 원흉인 재벌병원만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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