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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환자가 달리는 시한폭탄?…‘뇌전증’에 덧씌워진 낙인과 차별해운대 교통사고 원인 성급하게 뇌전증 탓으로 몰아…“건강보험 확대 등으로 적극적 치료 이끌어야”
EBS의 '편견이 키우는 병 - 뇌전증' 관련 영상 갈무리.

[라포르시안] 지난 2013년 8월 발간된 세계적 권위의 의학저널인 '란셋'(Lancet)지에 정신분열병의 명칭을 '조현병'(調絃病)으로 바꾼 한국의 사례를 소개하는 논문이 게재됐다.

서울대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권준수 교수가 교신저자로 참여한 ‘한국의 정신분열병 개명’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한국에서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병명을 개정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조현병의 의미 등을 상세히 담았다. 

대한조현병학회(前 대한정신분열병학회)가 지난 2007년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이 주는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명칭 개정 작업을 시작한 이후 2011년 12월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의 과정이 수록돼 있다.

조현병학회가 명칭 개정을 추진한 이유는 정신분열병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이질감과 거부감 때문에 더욱 큰 편견과 낙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명칭개정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조기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의 치료가 늦어지고, 환자들이 적극적인 치료에 나서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이 높았다.

'뇌전증'도 비슷한 이유로 지난 2010년 ‘간질’에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잘못된 명칭으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 효과'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인식에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뇌전증의 건강보험환자 진료비 지급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라면 2013년 기준으로 뇌전증 진료환자수는 13만6,233명에 달한다.

그런데 뇌전증학회가 지난 2013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비 청구자료와 의무기록조사자료 등을 토대로 국내 뇌전증 환자수가 17만명(2009년 기준)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뇌전증 환자수의 차이는 아마도 진료비 청구명세서 상의 질병코드와 의무기록상의 진단명이 다른 경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실제 뇌전증 환자수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란 점이다.

뇌전증학회는 "뇌전증 유병률이 파악된 환자수보다 많을 수 있다"며 "그 이유는 환자 자신이나 보호자들이 증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부정적 사회 인식이나 차별 때문에 환자나 가족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사회에서 뇌전증은 환자 본인에게 사회적인 '스티그마'(stigma, 낙인)와 다를 바 없다. 뇌전증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학교나 직장 등에서 차별을 받거나 왜곡된 시선을 수없이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뇌전증이 치료가 힘든 불치병이란 잘못된 인식도 한몫하고 있다.

신경과 전문의들은 뇌전증 환자가 적절한 약물치료와 수술치료를 통해 대부분 증상을 조절하고 치료가 가능한 질환으로 보고 있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상건 교수는 "뇌전증이 난치병이라는 사회적 편견은 환자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할 뿐 아니라 올바른 치료를 받는 데에도 큰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낙인'이 초래하는 가장 큰 폐해는 환자가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조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을 숨기면 만성화되고 결국에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증 치매나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를 정지?

그런데 최근 부산 해운대에서 17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교통사고의 원인이 가해 운전자가 앓고 있는 뇌전증 때문이라고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뇌전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가해 운전자가 사고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고 사고 당일 항뇌전증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토대로 뇌전증올 으로 인해 순간 의식을 잃거나 발작을 일으키면서 사고로 이어졌다는 추측이 쏟아졌다.

뇌전증이 교통사고의 원인이란 점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뇌전증 환자의 운면전허 발급을 제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국회에서 관련법 개정 논의가 성급하게 이뤄졌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운대 교통사고를 언급하며 "아직 정확한 사고원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운전자의 뇌전증 병력이 가장 유력한 사고원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중증 치매나 뇌전증 환자의 운전면허를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뇌전증 환자의 운전을 '도로 위의 시한폭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사회적인 낙인 효과를 부추겼다.

하지만 경찰이 추가로 확보한 사고 당시 CCTV 화면과 다른 차량에 찍힌 블랙박스 영상 분석을 통해 해운대 교통사고의 원인이 뇌전증이 원인이 아니라 가해 운전자가 뺑소니를 내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사고의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뇌전증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뇌전증 환자는 마치 운전을 해서는 안되는 듯한 왜곡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뇌전증 환자라도 항뇌전증 약물을 꾸준히 복용하면 일상생활이나 운전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사고의 원인이 뇌전증 때문인 것처럼 단정짓고 해당 질환을 앓는 환자들에 대해서 불필요한 오해와 차별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스럽다.

이런 식의 사회적 낙인이나 차별과 규제가 심화되면 뇌전증 환자의 적극적인 치료 의지를 꺾고, 뇌전증을 앓고 있는 사실을 숨기게 됨으로써 더욱 큰 문제를 초래할 우려도 높다.

오히려 뇌전증 치료에 대한 불합리한 건강보험 급여기준을 개선해 환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뇌전증학회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 가운데 25~68%가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60일 이상 항우울제 사용을 제한하는 급여기준 때문에 우울증 치료에 제한을 받고 있으며, 항경련제 약물 처방시 본인부담이 30%로 파킨슨병(10%)이나 암환자(55)에 비해 훨씬 높아 환자들의 약값 부담이 크다.

한 대학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 환자들의 건강보험 적용 및 장애인 등록기준의 현실화, 난치성 뇌전증의 희귀 난치성질환 등록 등 제도적 개선으로 치료 향상과 적극적인 사회생활을 도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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