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훈(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 기획이사)

[라포르시안] 의료기기산업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의료기기 책임보험’ 제도 운영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가 지난해 7월 시행된 ‘인체이식형 의료기기 책임보험 등 의무가입 제도’를 보완하면서 민·관 협력 체계로 운영되는 ‘의료기기 배상책임공제’ 수행 기관으로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이하 협회) 내 산하 기구를 설치·운영토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협회는 전담 부서인 ‘공제사업부’를 신설해 ▲공제신청 ▲배상금 신청접수 ▲공제료 징수·관리 등 전반적인 사업을 주도하고,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이하 정보원)이 의료기기 부작용 원인에 대한 인과관계 조사·평가를 담당한다. 이밖에 식약처는 정책적인 지원 및 감독 역할을 수행한다.

의료기기 책임보험은 인체에 30일 이상 삽입하는 이식형 의료기기에 한정되지만 향후 모든 의료기기로 확대돼 환자와 임상 현장 그리고 산업계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체이식형 의료기기로 책임보험을 한정한 이유는 과거 해당 제품의 회수 조치가 늦어져 환자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를 보상할 수 있는 법적 제도와 대책 부재로 모든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에게 전가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부 역할 또한 행정처분을 통한 업체 처벌에 국한될 뿐 정작 피해당한 환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의료사고에서 의료기기로 인한 과실을 입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의료기기가 규제기관으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만큼 안전하지 않은 제품이 시장에 출시·유통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후관리를 통해 촘촘하게 관리되고 사용 주체가 의사 등 전문가 집단이다 보니 사용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 또한 낮다.

이러한 이유로 근본적인 설계 구조상의 결함 혹은 재질 문제가 아니라면 의료기기 자체의 문제 발생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 전 모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서 문제가 발생한 의료기기에 대해 2년 동안 제품 회수를 지연한 것은 물론 부작용 피해를 입은 환자에게 약 60만 원에 불과한 피해 보상을 하면서 국민적 공분과 함께 제도 개선 요구가 들끓었다.

이후 식약처는 일단 위험성이 높은 인체이식형 의료기기를 대상으로 문제 발생 때 최고 1억50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의료기기 책임보험 등 의무가입 제도를 마련했으며, 내년부터 공제조합 시행을 앞두고 있다. 특히 의료기기 책임보험 제도 운영은 다방 면에서 의료기기산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첫 번째, 환자 보호와 관련해 의료기기산업계가 일종의 ‘연대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업체와 환자와의 신뢰 관계 구축에 기여하는 동시에 규모가 영세한 국내 의료기기업체의 제품 문제 발생 때 환자가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두 번째, 공제조합으로 운영되는 의료기기 책임보험은 고도화된 보건의료 현장에서 민원 발생 때 중재적 역할 수행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간 의료기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면 환자나 업체 모두 법률기관 외에 중재를 의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공제조합 설립으로 조사관이나 보상기준 등이 명확히 설정된다면 객관적인 조사 결과와 함께 업체가 법률 자문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세 번째, 제도적으로 조사 공정성이 보장돼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고 소비자가 최소한의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처벌만 있고 보상은 없는 기이한 구조가 없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의료기기업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네 번째, 의료기기업체는 소멸성 보험료를 지불하는 것보다 공제를 통한 자본의 누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가입자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기존 민간 보험사 보다 낮은 보험료에 더 나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다섯 번째, 책임보험 가입의 역선택 문제가 해결됐다. 기존 민간 보험사는 신용이 낮거나 위험도가 높은 의료기기업체의 경우 보험 가입을 꺼리거나 높은 보험료를 요구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의료기기 책임보험은 규모가 작고 영세한 업체가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고 최저 보험료 또한 낮아져 전체 의료기기산업계에 이득이 될 것이다.

식약처는 이러한 의료기기 책임보험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전반적인 사업 운영을 협회가 전담하고, 의료기기 부작용 원인에 대한 인과관계 조사·평가는 정보원이 수행하도록 했다. 이는 보상 및 판단 주체를 분리해 보상 회피 요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의료기기 책임보험 제도 운영은 임상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환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의료기기업체들이 의료기기 배상책임공제에 적극 가입해 안정적인 공제 재원 확보와 환자 보호에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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