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보험위원회 부위원장)

[라포르시안] 필자는 수년간 의료기술평가 분야 국제학회 ‘Health Technology Assessment international’(HTAi)이 개최하는 아시아정책포럼(Asia Policy Forum)에 참여하고 있다. 해당 포럼에서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의료기술평가를 담당하는 규제당국, 연구기관, 학계, 산업계, 환자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전문가 그룹이 2박 3일에 걸쳐 매년 선정한 주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과 발표를 통해 의견을 공유한다.

포럼을 마친 후에는 논의 내용을 학회 저널에 게재하고 연례 학회 행사에서 패널 세션을 마련해 논의 결과를 발표하며, 패널토론을 통해 투명성과 개방성·확장성을 도모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 싱가포르에서는 ‘아시아에서의 의료기술평가 역량 구축’(HTA Capacity Building in Asia: Towards One Goal)을 주제로 제10차 포럼이 열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 대면 형식으로 열린 해당 포럼에서는 전 세계적인 감염병 격랑을 거치면서 배우고 경험한 의료기술평가의 역할과 이를 실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역량에 대한 논의가 핵심 주제로 다뤄졌다. 특히 의료기술평가 역량 구축에 관한 각국의 경험과 과제를 논의하고 역량 강화 로드맵 일환으로서 실현 가능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유럽을 비롯한 호주·캐나다 등 선진국과 달리 아·태지역에서의 의료기술평가는 아직 소수의 국가에서만 그 체계가 확립된 상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적인 변화에 발맞춰 아·태지역의 많은 국가에서 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의료기술 시장진입 및 환자 접근성 촉진을 위한 도구로써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열린 싱가포르 포럼에서도 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역량 강화 가운데 몇 가지 주요 핵심 선결과제가 논의됐다. 이 가운데 시급히 요구되는 선결과제는 인재 확보와 육성이었다. 숙련된 인재 부족이 의료기술평가 수행 속도를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와 함께 의료기술평가에 대한 투자 부족과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료기술평가 결과물을 적용하려는 정치적 의지 부족이 논의됐다.

특히 의료기술평가의 가치와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료기술평가가 어떻게 해석되고 사용되는지에 대한 이해 부족이 장애물로 손꼽혔다. 역량 구축은 이해관계자, 특히 정책입안자에게 투명한 프로세스로서 의료기술평가 가치와 투자 필요성을 알림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포럼 참가자 가운데 우리나라와 호주를 제외한 대다수 아·태지역 국가들은 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아직 확립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은 역량 강화로 언급된 주요 요소 가운데 인재 확보, 의료기술평가 가치에 대한 이해, 투자 및 의료기술평가 결과물의 정부 정책 의사결정 반영 부분에서 이들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앞선 상황이다.

필자는 포럼에 참여하면서 우리나라의 의료기술평가 글로벌 리더십에 대해 생각해 봤다. 서구 유럽의 다양한 국가 가운데 주요 의료기술평가 기관, 예를 들어 영국의 NICE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지역을 이끌고 나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도 충분히 아·태평지역만이라도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국가와 한국의 모범사례(best practice)를 공유하고 해당 사례가 이들 국가에 수용되며 우리나라 인재를 해외 국가와 보다 활발히 교류하는 노력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노력은 국제기준에 부합해 수용 가능한 의료기술평가 제도를 우리나라가 선제적으로 마련할 때 가능한 일이다.

국내에서 아직도 ‘선 진입·후 평가’를 요구하는 의료기기산업계의 현행 의료기술평가 제도에 대한 우려를 해외 국가와 공유할 때 과연 그들이 우리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전성 및 유효성을 평가해 시판 승인된 의료기기에 대해 시장진입을 막고 있는 한국의 특이적인 의료기술평가 제도로는 해외에서의 적용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오는 11월 대만에서는 제11차 HTAi 아시아정책포럼이 ‘혁신을 촉진시키는 담대한 의료기술평가’(Being Bold–How HTA can Foster Innovation in the Asia Region)를 주제로 개최된다. 이 자리에서 의료기술평가 제도의 선험 국가인 한국이 다른 아·태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제도 정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 수행을 기대해 본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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