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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업도 이윤 포기하는데…하물며 정부는 무얼 하나
  • 김상기 편집부국장
  • 승인 2012.05.2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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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Children are not small adults)

미국 내 최고의 소아병원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 입구에 새겨져 있는 글귀다. 이 글귀에는 1855년 미국에서 최초로 개원한 소아전문병원의 오랜 경험과 깨달음이 녹아 있다. 소아의학 교과서에서도 이 글귀를 강조한다. 어린이는 단순히 성인의 신체를 축소한 작은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성인과는 다른 어린이의 연령과 체형, 심리 등을 고려한 최적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제품이 성인용과 소아용으로 구분돼 있다. 일반 공산품은 물론이고 식품, 의류, 가구조차 성인용과 소아용이 별도로 생산된다. 심지어 어린이용 가전제품까지 생산된다. 성인보다 작은 체격과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의약품과 의료장비 분야에서는 소아용 제품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의약품 중에는 소아용으로 개발된 제품이 없어 성인용 의약품을 반으로 쪼개서 투약하거나, 성인보다 적은 용량을 투약하는 식으로 복용이 이뤄지기도 한다. 성인에게 맞춰 개발된 의약품을 소아환자에게 투여하다 보니 효과는 물론 안전성에 문제가 생길 우려도 있다.

지난 2010년 기준으로 허가·신고된 전체 소아의약품은 총 1만1,437 품목에 이르지만 이중 소아 희귀의약품은 59품목에 불과했다. 그만큼 소아용 의약품 개발이 힘든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소아용 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임상시험이 쉽지 않다. 성인용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부모들이 임상시험 참가를 꺼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품을 개발해도 수요가 적다 보니 시장성이 크게 떨어진다. 당연히 제약사 처지에서는 소아용 의약품 개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의약품을 개발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수요가 워낙 제한적인 까닭에 충분한 이익을 낼 수가 없어서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제약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의약품뿐만 아니라 의료장비도 사정은 비슷하다. 만 2세 이하의 영유아가 심정지 상태에 빠졌을때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골강내 주사다. 그러나 국내 업체 중 영·유아 전용 골강내 바늘이나 카테터를 비롯한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업체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의약품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국내 한 업체는 소아전용 의료용 바늘을 생산했지만 적자를 감내하기 어려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적지 않은 업체들이 영·유아 전용 의료기기 개발 필요성에 공감하고 생산을 시도했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결국 포기하거나 생산을 하더라도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병원의 경영 상황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국내에서는 정부의 지원 아래 강원대병원, 전북대병원, 경북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 등 4개 국립대병원에서 어린이병원을 개설했거나 건립 중이라고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어린이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 어린이병원은 매년 1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내고 있으며, 부산대어린이병원은 연간 10억원 안팎의 손실을 보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기관이 설립한 어린이병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09년 문을 연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병원도 매년 70억~100억원의 적자를,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역시 연간 20억원의 손실을 봤다.

어린이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낮은 수가 때문이다. 소아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데는 성인환자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인력, 공간이 필요하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한 수가체계일리 만무하다. 예를 들어 간단한 심전도 검사의 경우 성인은 팔과 다리, 가슴에 전극을 붙이고 3분 정도면 완료되지만 소아환자는 약한 수면제를 먹이고 잠들었는지 확인한 뒤 진행해야 하므로 20~30분의 시간이 걸린다. 아이를 상대로 채혈할 때 발버둥치거나 정맥을 찾기가 힘들어 주삿바늘을 여러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여급여 혜택은 한 개만 적용된다.

특히 신생아중환자실(NICU)이 어린이병원 적자의 주범으로 꼽힌다. NICU의 경우 검사 시설과 방사선 촬영이 24시간 가능해야 하고, 인공환기장치를 비롯해 인규베이터, 환자감시기, 수액주입기, 황달치료기 등 수많은 시설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 전담 인력이 항상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NICU 하루 입원료는 14~16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병원협회가 2009년 NICU 입원료 원가 산정을 진행한 결과, 적정 입원료가 22~23만원으로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어린이병원에서 생기는 적자의 절반 이상은 신생아중환자실과 소아중환자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한 대학병원의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은 어린이 환자를 수술할수록 가산이 높은 반면 우리는 거꾸로 몸무게 대비 수가를 책정하는 모양새"라고 비판했을까 싶다.

한가지 사례를 보자. 지난 2009년 CJ제일제당은 페닐케톤뇨증 및 아미노산 희귀 대사질환을 앓고 있는 소아환자들을 위한 '햇반 저단백밥'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단백질 분해 과정에 필요한 효소 일부가 결핍돼 단백질이 함유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없는 페닐케톤뇨증 등 선천성 대사질환자를 위한 일종의 기능성 쌀밥이다. 페닐케톤뇨증을 앓은 환자가 단백질 성분인 페닐알라닌을 먹으면 그 대사과정에서 생기는 물질이 뇌를 비롯한 몸 전체에 심각한 손상을 주게 된다. 밥조차 맘대로 먹을 수 없는 처지이다.

국내에 이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200여명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어느 회사도 이들을 위한 저단백밥을 생산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일본에서 생산되는 저단백밥을 비싼 가격에 사다가 먹여왔다. 그런데 CJ제일제당이 사회 공헌 차원에서 기업의 이윤을 포기하고 8억원이란 개발비를 들여 저단백밥을 개발했다. 물론 CJ제일제당은 이 제품을 생산할 때마다 손해를 보고 있다.

저단백밥의 사례처럼 소아용 희귀의약품이나 의료장비 개발을 개별 기업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당연히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시장성이 극히 낮은 소아 희귀질환은 사회적 약자 배려 차원에서 정부가 치료제 개발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소아환자에 대한 의료적 배려는 그 나라의 의식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라는 점에서 지금의 소아 진료환경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정부는 의료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경제적 측면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적인 부분에 대한 고려가 이뤄질 때 '의료정의'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상기 편집부국장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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