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문제 믿고 맡길 의사를 둘 수 없는 구조…개원의도 끊임없이 무한경쟁으로 내몰려

[라포르시안]  흔히 국내 의료공급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게 '일차의료 붕괴'라는 말이다. 워낙 자주 등장하다 보니 익숙하게 들리지만 사실 '일차의료'에 대한 명확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못했다.

'일차의료 = 동네의원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의미가 통용되고 있다. 심지어 의료공급자와 정부, 의료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일차의료 개념도 제각각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차의료 활성화 정책도 대부분 겉돌거나 의료계나 환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보건복지부가 일차의료 활성화를 명분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와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 등의 정책만 봐도 그렇다.

복지부가 지난 2012년부터 고혈압과 당뇨병 등을 가진 만성질환 환자가 동네의원을 지정해 등록한 후 고혈압·당뇨 등을 지속적으로 치료·관리할 경우 환자에게 진찰료 본인부담률 경감(30% → 20%)과 건강지원서비스 혜택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실시하고 있는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의 경우 본인부담금 경감제도에 그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 시행 중인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은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에서 미흡하다고 지적 받은 만성질환 환자에 대한 건강교육·상담 기능을 확대한다는 취지로 시작했지만 환자들의 참여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기사: 복지부 일차의료 활성화 정책, 환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일차의료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들의 정책 수용도와 의료공급시스템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서 일차의료라는 개념이 구체화 된 것은 1978년 9월 알마티에서 세계보건기구(WHO) 후원으로 열린 '국제의료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의 개념을 정립한 ‘알마타 선언’이 채택됐다.

알마타 선언에서 규정한 일차보건의료는 단순히 일차진료를 넘어 국가보건체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며 개인·가족 및 지역사회를 위한 건강증진, 예방, 치료 및 재활 등의 서비스가 통합된 'Health For All'이란 개념이다.

일차의료의 속성으로 ▲최초 접촉 ▲관계의 지속성 ▲서비스의 포괄성 ▲조정 기능 등 4가지를 꼽는다. 환자가 몸이 아파 의학적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첫 관문 역할을 하고, 환자의 건강문제 대부분을 진료할 수 있는 포괄성을 지녀야 한다.

또 복잡하고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담당하고 연결하는 조정성과 언제나 환자를 계속 보살펴 주는 지속성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차의료라는 개념이 동네의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로 한정되고, 일차의료 활성화가 마치 '동네의원 살리기'를 위한 구호처럼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큰 맹점이 있다.

현재 국내 의원급 의료기관이 환자의 의료서비스 이용에 있어서 문지기(gate-keeping) 구실을 하는지, 환자와 지속성을 갖고 건강증진을 위한 포괄적인 서비를 제공하고 있는지, 혹은 그런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인지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2012년 펴낸 '한국 의료의 질 검토 보고서'(OECD HEALTH CARE QUALITY REVIEW: KOREA)를 통해 한국의 일차의료 기능이 취약해 '게이트 키핑'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병원과 의원이 경쟁구도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동네의원은 외과 수술과 입원서비스를 제공하고, 대형병원은 대규모 외래진료 부서를 운영하는 등 의원과 대형병원이 서로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과잉경쟁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차의료를 활성화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 지난 10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건강 향상을 위한 일차의료 활성화 방안 대토론회'에서 고병수 일차의료연구회 회장의 발표자료 화면. 

"일차의료 정립 위한 거버넌스 구조 만들어야"

지난 17일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회와 대한의사협회, 보건의료개혁국민연대 공동주회로 '국민건강 향상을 위한 일차의료 활성화 방안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실타래처럼 얽힌 의료전달체계를 재정립하고 국민의 건강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차의료 활성화 정책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이날 토론회에서 일차의료연구회 고병수 회장은 '시민들의 건강지킴이로서 동네의사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고병수 회장은 "한국에서는 일차의료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전문의 제도 초기에 외국처럼 일차의료 영역과 전문의 진료영역을 나누면서 효율적인 의료체계를 갖추게 하고, 일차의료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는 시기를 놓치다보니 후진적인 체계로 남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전문의 중심의 동네의원 의사 인력구조와 각 전문과 의원별로 단절된 전문분야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믿고 맡길만한 의사를 두지 못하고 아플 때마다 스스로의 판단 아래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의료이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왜곡된 일차의료 개념부터 바로잡아야>

고병수 회장은 "위염으로 동네의원 이곳저곳을 방문해 치료를 받다가 잘 낫지 않자 종합병원에서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고 췌장암 진단을 받은 사례처럼 환자와 의사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여러 의료기관을 돌아다니다가 합병증이 생기거나 병이 깊어지는 상황이 적지 않다"며 "주민들의 의료기관 선택이 너무 자유로워서 스스로 자가진단하고 병원을 찾아가다 보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일차의료 영역에서 한 명의 주치의로부터 지속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호전되지 않거나 이상이 있을 경우 신속하게 다음 단계의 검사나 처치를 받게끔 연계하는 의료이용체계가 형성되지 않은 탓에 발생하는 문제다.

일차의료 미정립의 문제는 비단 환자들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다. 개원의사도 일차의료 부재로 인해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게 된다.

고 회장은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과 같은 대형병원 외래와 동네의원은 무한 경쟁을 해야 하고,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의원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며 "종합병원이나 대형병원들과 일차의료기관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관계로 가야 하는데 지금처럼 무한 경쟁 구조에서는 개원의사들도 큰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일차의료 정립을 위한 과제로 ▲문제의식 공유와 사회적 합의 ▲'일차의료법' 제정 ▲일차의료 개혁을 통해 보건의료체계 개편 등 세 가지 를 제시했다.

고병수 회장은 "일차의료 정립을 위한 문제의식 공유와 사회적 합의를 위해 한국 일차의료에 놓인 객과적 문제점을 파악하고, 시민들이 원하는 일차의료와 의사들이 원하는 일차의료, 그리고 정부가 원하는 일차의료 시스템을 분석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공유하고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게끔 '일차의료 개혁 위원회'나 '일차의료 발전 위원회' 등의 사회적인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어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 합의된 개선안을 수립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 회장은 "일차의료 개혁의 필요성과 그 내용에 대해 공유하고 합의를 이뤄나가면서 동시에 법률이 마련돼야 한다. 법률과 시행령 등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동력이 서지 않기 때문"이라며 "일차의료 정립을 통한 국민건강 증진 목표를 기술하고, 장기적인 일차의료 발전 단계 제시, 일차의료 발전을 위한 효율성 있는 정책 지원 방안 등을 명시한 일차의료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일차의료 개혁을 선행하면서 합리적인 전달체계 재정립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며 "일차의료의 완성은 결국 나라 전체 보건의료시스템의 정립"이라고 강조했다.

▲ 일차의료 활성화 토론회 모습.

일차의료 개념·의료전달체계 개선 등 규정한 특별법안 필요

두번째 발제자로 나선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강재헌 교수는 '일차의료 발전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안했다.

강 교수가 이날 발표를 통해 제시한 일차의료발전 특별법안은 총 5개 장으로 구성됐으며, 제1장 총칙, 제2장 일차 보건의료 기능정립 및 의료전달체계 개선, 제3장 일차의료 교육 수련 지원 등, 제4장 일차의료 인력 재교육·일차의료 모델 개발 지원 등, 제5장 보칙 등으로 구성됐다.

특별법안은 '일차보건의료'의 개념은 국민이 가장 먼저 대하는 보건의료로서, 지역주민에 대한 질병의 예방·치료·관리 및 건강증진을 위한 활동과 이를 위해 지역사회 자원을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투입·관리하는 활동으로 규정했다. 

질병의 예방·치료·관리 및 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으로 ▲지역사회에서 흔한 질병과 외상의 예방과 치료 ▲주요 감염성 질환 및 지역적 풍토병의 예방과 치료 ▲만성 혹은 재발하는 질병의 후속 관리 및 지속 관리 ▲재활서비스 ▲산전지찰과 출산, 산후 모자보건 관리 ▲정신건강 관리 ▲구강보건사업 ▲지역사회 보건의료 인력의 확보와 훈련 등을 망라했다.

일차의료 발전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소요되는 예산 확보, 그리고 일차 보건의료 확산 및 정착에 필요한 대국민 교육·홍보 등의 사업 수행을 의무화 했다.

특히 일차의료 교육 수련을 지원한 3장에서 각 임상과목에서 일차의료 수련에 필요한 인건비, 교육수련비 등의 비용을 정부 예산으로 일부 또는 전부 지원하고, 일차의료 수련기관에서 필요한 시설 등을 설치하는 경우에도 정부 예산으로 일부 또는 전부를 지원하게끔 규정했다.

강 교수는 "유럽 각구과 미국, 캐나다 등 많은 선진국은 일차 보건의료를 강화하고 지원하기 위해 재정 지원을 포함한 보건의료개혁을 추진하고 있고, 일차보건의료 강화를 통해서 얻은 많은 성과들이 보고되고 있다"며 "일차의료 발전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을 통해 산적한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국민 건강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 특별법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일차의료 활성화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 필요해"  

일차의료 특별법에 대해서 관련 단체와 전문가들은 그 필요성에 공감하며 보완해야 할 점도 제시했다. 

한국소비자연맹 강정화 회장은 "의료기관에서 질병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하다보니 환자들의 의료쇼핑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며 "특별법안 내용에 의료소비자의 수용성을 높이는 방안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국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그동안 일차의료 활성화는 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 간 싸움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었다"며 "일차의료 활성화에 대해서 보다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단장은 "일차의료가 잘 할 수 있는 만성질환관리 등의 영역을 중심으로 관련 수가 인상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며 "또한 지불제도 개편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금의 한국적 의료상황에서 일차의료 활성화와 이를 위한 특별법안 제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다.

한겨레신문 김양중 의학전문기자는 "지속적인 치료를 포함해 가족 같은 의사의 설명과 의료서비스를 원하는 국민들과 현재 위기에 처한 개원가의 처지가 일차의료 강화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 제도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일차의료특별법의 제정 움직임은 충분히 환영하지만 국민들이나 의사들 모두 주치의, 일차의료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 법 제정을 가로막거나 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제대로 실현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일차의료전담의사' 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이용민 소장은 "일본에서도 현재 '종합진료전문의' 제도를 시행하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이제 더 이상 늦추지 말고 일차의료전담의사 제도를 도입하도록 국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의원급과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역할을 정립할 수 있도록 강력한 제도개선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소장은 "일부 외국의 사례처럼 병원과 의원의 외래진찰료를 역전시켜 일차의료기관은 고육의 외래진료에 특화시키고 진료시간에 따른 진찰료 누진제 도입 등으로 경영환경을 개선토록 해 인적·물적 투자를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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