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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건의료 분야 전문가들에게 환자로서 부탁합니다강주성(‘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의 저자, 현재 병명 미상의 호흡기계 환자)

[라포르시안] 15년 만에 이야기하는 건데, 내가 일하면서 가장 난감하고 어려웠을 때가 있었다. 그건 2001년,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을 시작한 지 한 일 년여쯤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당시 나는 밖으로는 약가인하 투쟁을 하면서도 해당 다국적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의 한국 사장과 물밑에서 계속 약가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 서너 번 만났을 때였을까?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일차로 약가가 결정되기 며칠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만남에서 노바티스사는 내게 자신들이 주장했던 한 알에 25000원의 약값을 환자들이 인정해주면 환자들이 내야 했던 30%의 본인부담금(당시에는 암환자들의 본인부담금이 30%였다. 그러나 이 투쟁으로 인해 이후 전국의 모든 암환자들의 본인부담금이 처음으로 20%로 떨어지게 된다.) 전액을 자신들이 대납해주어서 환자들은 본인부담금 없이 약을 평생 그냥 먹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약값이 한 달에 300만원이었으니 30%면 한 달에 90만원이다. 약을 기준치보다 더 먹어야 했던 중증환자들은 한 달에 본인부담금만 135만이나 180만원을 내야 했다. 그런데 이걸 제약회사가 대신 내주고 환자는 평생 약을 공짜로 먹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치료비로 전전긍긍하며 살던 모든 환자에게는 가히 눈이 번쩍 뜨일 환상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맨 앞에 서서 투쟁단을 이끌고 환우회를 만들었던 나는 그날 가장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할 것이냐…’

딱 한나절 고민했다. 그날 저녁 이 이야기를 환우회 게시판에 올렸다. 그리고 물어봤다.“우리는 지금까지 일 년 간 왜 싸웠는가? 물어보자. 약값을 내리자고 싸웠는가? 아니면 약을 공짜로 먹자고 싸웠는가? 만약 약값을 인정해주고 우리가 약을 공짜로 먹으면 그 약값은 누가 내는가? 국민들이 보험료로 비싼 약값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럼 국민들은 비싼 약값 내고 우리는 공짜로 먹고?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한다. 만약 제약회사의 제안을 받자고 하시는 분이 있으면 환우회에서 나가시라. 나가서 따로 싸우시라.”

본인부담금이 없는 약값 제안은 환자 당사자인 우리들에겐 어쩌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환자들은 그 제안을 뿌리치고 다시 투쟁에 돌입했다. 글리벡 투쟁이 세계 약가투쟁사에 하나의 역사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외국인 노바티스 사장이 그 후 내게 했던 말이 생생하다. “당신들이 정말 환자단체가 맞습니까? 어떻게 환자들이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백혈병 환자들의 글리벡 약가투쟁은 2001년 초반부터 2003년 초반까지 보건의료 정국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처음으로 암환자들의 본인부담금이 20%로 낮아지면서 지금처럼 5%까지 낮아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게 되었다. 이후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각종 질환의 환우회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0년 전인, 2006년 조사할 때만 해도 온오프라인 다 합쳐서 환우회가 전국에 2천개가 넘었으니 환자 당사자들의 활동이 양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최근 2년, 꺼져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불씨나마 피울 수 있게 해주었던 힘은 전적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힘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민족적 각성을 요구해왔던 힘은 그 힘없고 노쇠한 위안부 할머니들이었다. 여기에 밀양 할매들의 투쟁은 어떠한가? 대추리 농민들과 강정마을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새만금 투쟁 때 부안 농어민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횃불을 들고 해상 시위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 힘없는 분들이 그 당시 정국을 이끌었던 분들이다.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이 분들을 끌어 왔던 게 아니라 거꾸로 이 분들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끌고 정국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 이 분들은 예전부터 우리도 모르게 사회운동을 위해 자신들을 갈고 닦았던 분들일까? 글쎄. 밀양할매들이 마지막 빨치산 할매들인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분들이 생존권의 문제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두에 이야기한 글리벡 관련한 환자들 역시 그러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사례에서도 볼 수 있지만 권력을 쥔 자들은 항상 온갖 이간질을 해댄다. 돈으로 매수하기도 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하며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제로 진압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반목하게 되고, 조직은 분열된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올곧이 그 상황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당사자이면서도 생존권의 문제를 넘어선 분들, 바로 이 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굴려나가는 분들이다.

그러면 당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당사자는 어떤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크게 얽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일상적으로 환자 당사자, 장애 당사자, 피해 당사자 등등 주변에 많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가장 강력하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을 이루면 더 강력해진다. 하지만 이해관계의 외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배타적이고, 경계심이 강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해에 거꾸로 가장 약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당사자들의 운동은 집단 이기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사자주의가 위험한 이유이고,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서 조합주의가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토양은 종국적으로 건강한 당사자운동을 잉태하는 조건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당사자 활동의 양적 확산은 질적 변화의 전제조건이다. 사회운동하는 많은 분들이 대중운동에 실패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거두절미하고 어떤 개인과 조직과 집단을 특정 상황에서 바로 질적 변화를 시키려고 하는 욕심이 가장 큰 이유이다. 상대를 자기 틀 속에 맞추려는 주관적 프레임이 형성된다. 이 때문에 당사자들의 배타심과 경계심은 더 심해지고, 반대로 반대편의 당사자들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해서 이들을 분리하고 조직을 와해시킨다.

개인과 집단의 질적 변화는 학습과 경험의 양적 확장 과정에서 특정 계기를 맞이하여 이뤄진다. 문제는 이 때 누가 어떻게 변화의 불씨로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리더는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탄생된다. 환자운동은 당사자 운동의 하나이며, 이제 기껏해야 양적 팽창을 하고 있는 수준이다. 장애인운동과 비교하면 훨씬 더 초보적이다.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초보적이라는 게 아니라 전체 당사자들의 인식수준과 조직화가 초보적이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환자운동은 초보적인 소비자운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운동의 내용 역시 올바른 소비를 위한 소비자(환자)의 권리확보와 이를 위한 제도개선 활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매우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 내에서의 일반 상품소비와 의료소비를 동일하게 바라본다면 환자운동은 매우 큰 운동적 철학적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환자가 자신을 소비자라 보고 이것을 소비와 공급의 상관관계에서 이해하고 문제해결의 답을 찾아나갈 때 결국 그것은 시장이 요구하는 공급과 소비의 프레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환자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고민이 이루어져야 할 텐데 주변의 상황은 아직 요원하다. 실제 이 운동이 지속가능한 운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아직 명료하지 않을뿐더러 운동주체로서의 환자에 대해서도 아직 다양한 형태의 시각으로 논의된 바도 없다. 그러나 이건 환자가 만들어야 할 과제들은 아니다. 이건 소위 먹물들의 역할이다. 당사자들은 먹물들이 만든 논리에 숨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그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하고 종국적으로 완성해나간다. 환자운동에서도 그런 상호작용이 기대되는데 아직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내가 보기엔 한 명도 없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깝다. 전문가라고 하시는 분들, 한두 명이라도 이쪽으로 역할 좀 분담해주시라. 허구한 날 정책만 연구하지 말고 운동 주체에 대한 연구도 좀 하시라. 환자로서 부탁하는 것이다.

강주성은?

1999년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후 골수이식으로 새 생명을 찾았다. 2001년 백혈병치료제 '글리벡' 약가인하투쟁을 주도했고, 한국백혈병환우회와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를 창립해 적극적인 환자권리운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라는 책도 썼다.

라포르시안  webmaster@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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