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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을 위한 든든한 배경이 됐던 의사[신간]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 고 배기영을 기리며

[라포르시안] 사회적 약자들의 든든한 배경으로 살다 간 어느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다.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고 배기영을 기리며(건강미디어협동조합)'는 신촌 로터리에서 동교동 사거리로 향하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동교신경정신과의원을 운영하던 배기영 원장의 삶을 정리한 책이다.

지난 2015년 6월 타계한 고 배기영 원장은 정신장애인과 노숙자, 고문 피해자, 수배 중인 학생 운동가, 사측의 탄압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입은 병원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뒤에 서서 헌신했던 인물이다.

사회적 재활을 강조한 정신보건법 제정, 고문 피해자의 첫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승소, 직장 내 ‘왕따’로 인한 노동자의 피해 최초 인정, 정신 질환의 산업재해 최초 인정 등의 뒤에는 배기영 원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에 참여하며 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고문피해자' 문국진씨를 돕기 위한 활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특히 의사로서 고문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소견서 작성을 맡았다. 문국진 씨의 소견서에 ‘심인성 편집증적 정신병'이라고 기재하고, "어떤 정서적 스트레스에 의해 명백히 유발된 편집증적 상태"라며 특히 수감자에게서 일어나기 쉽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국진 씨는 결국 1996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1억5천만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최규진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의학교육학과)는 이 책에서 "이 판결은 단지 문국진 만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며 "또한 이 소송 과정은 한국 사회에 대한 치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치유의 과정에서 배기영은 의사가 그리고 의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탄압받던 병원 노동자들에게도 든든한 배경이 됐다. 1998년에 청구성심병원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조합원을 대상으로 ‘식칼 테러’와 ‘분변 투척’을 저지른 사건이 알려졌다.

당시 병원 사용자 측의 극심한 탄압으로 많은 조합원이 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정신질환 증상까지 생겼다. 특히 병원이 해고후 복지한 치위생사 김태복씨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식의 탄압을 가했다. 마치 그가 병원내 공간에 존재하지만 철저히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인 것처럼 모든 업무과 인간 관계에서 그를 배제토록 했다. 김태복 씨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1년 6개월 버텼다.

그러던 중 인의협을 통해 배기영 원장을 소개받았다. 노조탄압의 가해자가 병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모두들 진단서 작성을 꺼리는 가운데 배 원장은 김태복 씨의 정신 상태를 진찰하고 그가 겪은 정신적 고통의 무게를 가늠해 진단서를 작성했다.

김태복 씨와 청국성심병원 노조가 배기영 원장이 작성한 진단서를 근거로 1억원의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병원 측과 담당 진료과 과장에게 '직장내 왕따' 사과와 함께 위자료 지급명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청구성심병원 집단 산재 인정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2003년 7월  배기영 원장으로부터 진단을 받은 8명의 조합원이 집단산재 신청을 냈다. 국내에 산재제도가 도입된 이래 정신질환을 이유로 신청을 한 사례는 청구성심병원 노조 조합원들이 처음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2003년 8월(5명), 9월(3명)에 청구성심병원노조 조합원 8명이 낸 산재인정 신청을 모두 승인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조탄압에 의한 집단 정신질환 인정 사례였다. 청구성심병원 정신질환 산재 인정 사건은 사회적으로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고, 직업병원의 범위를 심리·정신 영역까지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은 배경처럼 소리 없이 약한 자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응원하고 도왔던 어느 의사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며 퍼즐처럼 짜 맞춘다. 늘 힘겨워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도우며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남은 게 없다.

평생 간호사 한 명 딸린 자그마한 의원을 운영했던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의사답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저자인 최규진 교수는 책의 서문에서 "그의 행적은 지인들에게 간밤의 꿈처럼 분명 몸으로 느꼈지만 잘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했다"며 "이 글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퍼즐임을 미리 고백한다. 그럼에도 대략이나 맞춰진 퍼즐이 무슨 그림인지 알려주듯 지인들의 증언과 몇 안 되는 기록들을 긁어모은 이 글이 배기경의 삶은 거칠게나마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 고 배기영을 기리며
최규진 지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232쪽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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