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민간 차원서 국가폭력피해자 위한 치유센터 설립 추진돼

▲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
영화 '남영동 1985'는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벌어진 상황을 다룬다. 영화 속 내용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민주화 운동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22일간 당했던 참혹한 고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고 김근태 상임고문은 당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26년간 정신적외상증후군을 앓다가 지난해 12월 뇌정맥혈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국가 폭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자행돼 왔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생존자들은 오랜 기간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피폐해 진다. 

인권의학연구소가 작년에 펴낸 ‘고문피해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문생존자 36.6%가 알코올 의존 경향을 보였고, 대부분 만성질환, 근골격계질환 등을 앓고 있었다.

정신질환 유병률은 남자의 경우 일반인 보다 1.26배 높은 38.6%를 기록했는데, 자살시도자도 응답자의 24.4%에 달했다.

고문생존자는 고문 경험을 지속적으로 재경험하거나 심리적 고통을 신체적 증상으로 지각하는 신체화 증상 등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는 것은 물론 대인관계 부적응이나 적대감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당연히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인만큼 정부 차원에서 고문피해자를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다행히 지난 10월 정부 지원으로 광주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문을 열고 국가폭력피해자의 치유를 시작했다. 

현재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임상심리사, 상담사, 사회복지사, 정신과 전문의, 간호사로 구성된 팀이 고무피해자들의 치유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지역의 정신과, 정형외과 등 1차의료기관과 연계해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을 치료하고 있다.   

치료 단계는 최초상담과 심리검사를 거쳐 심층상담을 하고, 정신과적 치료와 재활프로그램을 병행하게 된다.

광주트라우마센터 김준근 운영지원팀장은 “심리검사 시에는 피해 경험을 디테일하게 묻지 않고 '예, 아니오'만 답하게 한다. 피해자가 재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재활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한데 피해 경험을 하기 전 상태로 돌려 놓는 작업으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 의학적 치료의 경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밖에 센터는 심리치료와 더불어 신체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물리치료실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복지부 정신건강보건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오는 2013년부터 3년간 총 24억여원이 지원될 예정이다.

민간 차원의 국가폭력치유센터 설립도 추진민간에서도 국가폭력치유센터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인권의학연구소(이화영 소장)는 인권클리닉 개설에 이어 지난 8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설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최근에는 후원의 밤 행사를 개최하는 등 설립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내과전문의)은 국가폭력에 따른 피해자의 치료뿐 아니라 국가폭력 자체가 발을 붙일 수 없도록 치유센터 설립이 절실하다고 주장해 왔다.

인권의학연구소는 그동안 고문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내년 6월 치유센터 개소 전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출 계획이다.

광주트라우센터나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모두 해외 고문피해자재활센터를 벤치마킹한다. 

▲ 덴마크 고문피해자재활센터 RCT 홈페이지.

한국보다 약 30년 앞서 국가폭력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덴마크는 고문피해자재활센터(RCT)를 국제 규모로 키워냈다.

현재 RCT는 전 세계 70개국 4,000여명의 의사 등이 고문피해자 재활과 고문 방지를 위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 보건단체다.

RCT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고문피해자 재활 및 치유프로그램을 개발, 적용하고 있어 국가폭력치유에 첫발을 내딛고 있는 국내 현실에서는 배울 게 많다.

나눔신경정신과 손창호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한국에서 고문피해자 치유단계는 고문생존자의 안전확보를 하는 단계”라며 “말하자면 고문 등으로 인한 자기증상을 본인이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피해 기억을 정리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의미 부여까지 하는 단계로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RCT가 내놓은 고문피해자재활 메뉴얼(2.1버전)을 보면 ▲재활 ▲통합적 ▲문화적 ▲근거중심적 치유를 강조한다. 

재활적 치유는 신체적인 치료 보다는 사회적 참여와 활동 증진에 초점을 맞추고, 통합적 치유는 정신과, 약리, 심리, 사회적 치료를 병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 RCT는 피해자가 살아온 지역의 관습과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치유자와 피해자 간의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하다.

손창호 원장은 “의사가 고문생존자와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치료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며 “다시 말하면 의사가 그만큼 피해자의 고문 경험을 듣고 같이 공감하고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각오와 역량이 필요하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