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의료, 인권을 만나다 - 보건의료인을 위한 인권 교육서

[라포르시안] 고소득층에 비해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비만이 되기 쉽다거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는 건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됐다.

그뿐인가. 사회경제적 인구집단별로 사망률이나 의료서비스 이용률 등에 있어서 건강불평등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특히 건강불평등이 부모에서 자식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음은 굳이 학자들의 연구분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현실이다.

소득 혹은 교육수준에 따른 건강불평등이 몸에 새겨질 정도로 뚜렷하게 드러나고, 또한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현실에서 의료가 오롯이 병을 고치는 행위에만 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의료접근성은 곧 건강권의 문제이고,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건 곧 인권 보장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의료는 인권과 별개의 분야이고 전혀 동떨어진 사안으로 인식된다. 산부인과 진료실과 대기실에서 환자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라는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오랫동안 이뤄졌지만 그것이 인권침해인줄 몰랐다. 정신장애인의 격리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은 국가 정책 아래에서 정신병원에서 숱하게 이뤄진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는 다 말하기 힘들 정도다.

의료와 관련된 많은 사안이 인권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지만 의료계의 인권감수성은 무딘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료계에서 인권과 관련한 교육 과정이나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한 자료나 서적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번에 출판된 '의료, 인권을 만나다(건강미디어협동조합)'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보건 의료인을 위한 인권 교육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저자로는 의료와 관련한 여러 현장에서 인권 관련 활동을 실천해 온 의료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인권의학연구소'를 설립해 취약 계층의 건강권 실태 조사와 인권 피해자의 치유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의사부터 정신 장애인 재활·인권 분야에서 활동한 의사, 에이즈 연구와 인권 운동에 참여한 의대 교수, 반핵의사회에서 활동하는 의대 교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 의료민영화 반대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운동을 벌여온 의사, 단식농성을 하던 세월호 유가족의 진료를 맡았던 의사 등이 자신의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인권의학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냈다.

전체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1장에서는 ‘의료, 인권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인권과 건강의 관계와 의료인들이 왜 인권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다뤘다.

현대 인권에 관한 일반적 개념과 원칙에 기초해 의료와 인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고 건강권과 건강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핵심을 통해 개인의 건강 보호와 증진이 개인의 권리이자 국가의 책임이란 점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의료인을 인권에 기초한 의료활동을 통해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전문가로 정의하고, 인권 침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피해자들을 위해 전문가로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비윤리적 요구에 저항할 수 있도록 그 실천적 지침을 제시했다.  

2장에서는 ‘트라우마 사건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뤘다.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해 온 가정 폭력, 성 폭력, 국가 폭력과 같은 폭력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과 같은 재난 트라우마 사건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 기전을 설명하면서 폭력 및 재난 트라우마 피해자 치유 과정에서 의료인이 숙지해야 할 일반 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차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3장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모든 장애인 인권 이슈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통해 사회적 차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위해 사회권과 자기 결정권의 회복이 가장 필요한 영역이란 점을 짚었다. 차별의 대표적 사례로서 HIV 감염인이 겪는 인권 침해와 그 결과를 기술하고, HIV 감염인에 대하여 의료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소개해 놓았다.

4장에서는 ‘환경과 건강권’을 주제로 환경이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대책을 소개한다. 일본은 물론 한국 사회에서도 최근 건강을 위협하는 환경으로 인식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에 의한 방사선 피폭 문제를 다루면서 건강에 위협이 되는 방사선 피폭 문제를 인권 차원에서 인식하고 의료인으로서의 대응 방안을 다뤘다.

또한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대량 발생했던 희귀 질병을 중심으로 건강권 증진을 위해 현장에서 활동해 온 의료인의 경험을 토대로 노동환경의 문제를 인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노동자의 건강권 실현을 위해 의료 현장에서 적용해야 할 그 실천 지침을 수록했다.

‘빈곤과 건강권’을 주제로 한 5장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공공의료 비중이 최하위인 한국의 의료현실에서 의료민영화 정책이 국민의 건강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취약계층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마지막 6장에서는 ‘특별한 의료 이슈’로 단식 농성 중인 단식자의 건강 문제와 의료계의 권위주의에 대해서 초점을 맞췄다.

구체적으로는 단식농성 상황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단식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단식자를 진료하는 의료인의 윤리 원칙 및 실천적 지침을 소개한다. 의료계의 권위주의는 예비 의료인과 의료인들의 안전과 인권 감수성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안전과 인권 존중에도 연결되는 주제로 이에 대한 분석과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석태 변호사(전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추천사를 통해 "의료계에 아직 낯설어 보이는 인권적 관점을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주요 의료 관련 주제에 도입해 분석과 비판적 성찰을 시도한 최초의 책"이라며 "이 책은 나치에 협력한 의료인들은 처벌되었는데, 왜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적어도 고문 현장에 있었거나 이를 목격한 의료인들은 그 어느 한 사람 자성의 발언 하나 없나 하는 아픈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물음은 그동안 의료계에 인권적 관심이 결여된 듯이 보여 온 사정을 어느 면에서 설명해 주는 듯도 하다"고 말했다.

저자로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 손창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현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이영문 아주대 인문대학 특임교수, 최용준 한림대 의대 교수, 김익중 동국대의대 교수, 공유정옥 '반올림' 활동가,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이보라 녹색병원 호흡기내과 과장, 최규진 인하대 의대 조교수 등이 참여했다. 인권의학연구소가 책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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