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수석부회장)

[라포르시안] 얼마 전 우연히 신간 ‘의사는 윤리적이어야 하는가’를 읽었다. 특정 직업군이 그에 부합하는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고대 철학의 논쟁이 될 만큼 오래됐지만 현대에 와서도 통용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코로나19가 한참일 때 미국에서는 인공호흡기가 부족해지자 자국 내 공장 시설을 개조해 필요한 의료기기를 생산하게 하는 대통령 긴급 명령이 고려됐다.

우리나라 역시 부족한 감염 관련 의료기기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가용 시설에 대한 조사와 검토가 이뤄졌다. 또한 나라마다 코로나로부터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의료기기 수출 금지 품목을 늘리면서 이를 구하려는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일부에서 국가적 위기를 악용해 마스크·진단키트를 매점매석 하거나 가격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해 폭리를 취하는 등 비윤리적 사익 편취로 시장을 교란시키고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유독 보건의료에 특화된 윤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불가역적인 인간의 생명과 연관돼 있으며 이는 가장 높은 가치로서 때로는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을 요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명확한 답이 없는 게 현실이다. 미국의 의료기기산업이 세계 최고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제품 개발에 따른 이윤을 국가가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 

제약회사가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소요되는 신약 개발 비용을 감내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기기업체가 아무리 막대한 자금을 들여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도 수가는 정부와의 협상에 따라 결정되고 충분치 않은 가산 수가 정도의 이윤을 볼 수밖에 없다 보니 수출을 고려하지 않는 한 신제품 개발에 보수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의료기기 규제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복잡다단해지면서 업체가 부담해야 할 부가적인 행정비용은 증가하는 반면 인허가를 담당하는 규제기관은 높아지는 규제 수준과 늘어나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각종 허가심사 민원 적체가 심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시장 규모가 작고 이윤 보장이 충분하지 않은 의료기기업을 포기하거나 혁신 제품 개발을 포기하는 업체가 생겨나고 있다. 결국 비용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규제 강화는 그 비용 부담과 피해가 고스란히 건강보험 재정과 국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보건의료산업은 ‘공공재’로서의 선언적 의미가 각인됐지만 정작 그러한 희생을 보상할 만한 사회적 합의나 체계가 구축되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의료기기는 공공재적 가치를 가진 대표적인 규제 산업으로서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생산·유통되고 있는 만큼 관련 산업과 업계에 대한 정부의 정책 지원이 요구된다. 우선 의료기기 연구 개발에 대한 지원 확대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매년 지원 자금 규모가 늘어나고 있지만 여기에 더해 세제지원이나 비용에 대한 추가적인 혜택이 제공돼야 한다.

또한 각종 의료기기 시험 비용에 대한 업체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그동안 국제조화라는 이유로 국내에서 소비되는 의료기기에도 국제 인증을 받은 시험성적서가 요구됐다. 관련 제도 시행 초기 시험기관에 대한 규모의 경제를 고려해 모든 제품에 일괄 적용·시행했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의 의료기기 수출 규모도 커진 만큼 제조업 부담 경감을 위한 GLP(Good Laboratory Practice·비임상시험관리기준) 성적서 의무화 같은 시험검사 비용 절감을 위한 제도화가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규모가 영세한 국내 의료기기 제조사가 보다 안전하고 개선된 제품을 출시하고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높아진 인허가 수수료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해 제도적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제조업·중소기업을 위한 특례 조치가 필요하다. 의료기기는 미래 먹거리산업이자 코로나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의 전략적 비축물자이기도 하다. 자국 업체와 함께 국내 생산 의료기기 종류가 많아질수록 유사시 우리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힘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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