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노동건강연대 회원, 공인노무사)

[라포르시안]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5살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중독으로 숨진 산재사망 사건을 돌이켜볼 때, 진료실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던진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노동환경 개선의 시작을 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병원을 찾은 노동자에게 주로 하는 업무와 사용하는 물질을 의료인이 묻는다면 보다 적정한 진료를 할 수 있고, 다친 이후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진료실에서 환자의 직업력을 묻는 의료전문가의 질문은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정책 개선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현장의 의료전문가가 적합한 치료와 재활 및 예방을 위해 환자의 직업을 묻고, 직업이 건강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고민하자는 의미에서 '노동건강연대'와 함께 격주로 연속기고 시리즈를 싣는다. <편집자주>

내가 있는 곳(성동근로자복지센터)에서는 지역사회의 노동문제에 대응하고, 노동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10년 동안 펼치고 있다. 성동구에서 노동권익활동은 역사가 매우 깊다. 센터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지역의 노동·주민단체들이 그 활동을 해왔다. 그중 미약하게나마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이다. 일하는 환경과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임금과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에 대한 논쟁에 비해 자주 뒤로 밀려난다. 해고 등 당장의 생계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건강문제는 어느정도 참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건강권 활동은 주목받기도 지속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민간위탁센터에서 노동자 건강권 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역에서 노동자 건강권 활동을 펼쳐나가기엔 기초적인 정보 자체가 너무나 부족하다. 지역 내 산업의 분포라던가 비정규직이나 감정노동 종사자의 규모같은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부에서 주요 통계자료로 활용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와 부가조사, 사업체 노동력조사 등의 통계는 자치구(기초자치단체)까지 구분하여 자료를 생산하지 않아 활용할 수가 없다. 정부는 이 자료들을 통해 정부는 비정규직의 규모, 감정노동자의 규모와 특성 등을 분석하지만 정작 지역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매년 발표되는 사업체조사보고서의 자치구 단위까지의 내역이 있어 이를 기초로 파악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이슈를 발굴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활동한 활동가나 행정관료의 직관에 의존하거나 큰돈을 들여 실태조사를 하면서 부족한 자료를 채우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작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기초자치단체가 활용할 수 있는 통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원하는 공적 체계 역시 매우 취약하다. 각 자치구마다 보건소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을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펼치고 있다. 대다수 노동자는 보건소가 운영하는 시간에는 직장에 있고, 노동자가 퇴근하면 보건소도 문을 닫는다. 그렇게 공적 보건체계를 이용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보건소 운영시간을 늘리자는 주장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주거지가 아니더라도 사업장 인근의 보건소를 이용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나아가 성동구나 영등포구처럼 공장이 밀집해 있는 지역과 강남구나 서초구처럼 사무직이 밀집해있는 지역이 특성이 다르듯, 보건소에 지역 산업을 고려한 보건의료체계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활동하는 내내 상상해보는 것들이다. 성동구가 최근 필수노동자를 대상으로 무료 백신접종을 시행한 것은 지역 노동자가 보건의료체계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는 측면에서 아주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노동부(안전보건공단)는 지역의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는 근로자건강센터를 설립하고 있긴 하다. 서울 두 곳을 포함해 전국에 22개가 설치되고 센터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 분소가 있기도 하다.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근골격계, 뇌심혈관계, 우울장애 등의 건강관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곳이 가까운 곳에 생긴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전국에 22개라니, 역부족이다. 서울만 해도 노동자가 520만 명이고, 주 사업대상인 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290만 명이다. 서울에 센터가 두 곳이고, 분소가 두 곳이니 분소까지 합하더라도 한 곳당 노동자 73만 2천명이 이용해야 하는 셈이다.

당장 공적 체계를 만들기 어렵다면 기존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안전보건 활동가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안전보건활동가의 경험을 통해 지역의 노동특성을 분석해내고, 숨겨진 위험을 발견하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다만 이 때 “성과주의적 접근”으로는 오히려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도 어렵고,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오히려 파괴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소위 민관협치라는 오래된 고민거리가 끼어들어오게 된다.) 활동의 경험을 존중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내올 수 있는 지원 방법과 경험과 지원을 헤치지 않을 사업 검증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일하는 성동구는, 거리 풍경이 10년 전 처음 왔을 때에 비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소영세사업장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견뎌가며 생계를 꾸리고, 지역사회의 경제를 떠받쳐 왔다. 골목길 작은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성동의 노동자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조직하여 왔다. 새로운 모습의 노동자가 출현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삶과 노동은 큰 틀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노동의 궤적은 삶의 궤적이, 지역의 궤적이 되어 왔다.

그런 지역의 삶들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자가 안정적이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4차 산업이니 인공지능이니 거창한 말이 무성하지만 사람이 빠진 어떠한 구호도 지역의 노동자에게는 공허하다. 건강한 노동, 건강한 삶의 궤적을 지키기 위해 지역 기반 정보와 체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노동건강연대는 모든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옹호하고 이를 위한 활동을 하는 사회운동단체이다. 계약직, 파견, 외주하청,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 등 노동조합을 조직하기조차 힘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을 펴고 있다. 기업이나 정부의 후원을 받지 않고, 단체 활동을 지지하는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노동건강연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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