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내 요양병원에는 '일당정액수가제'라는 독특한 진료비 진불제도가 적용된다. 일당정액제란 치매나 암 등에 걸린 환자가 요양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서 치료를 받을 경우 행위별 수가 대신 자원소모량을 기준으로 한 일당(日當) 정액을 적용받는 방식이다. 진찰과 검사, 처치, 입원료, 약값 등의 진료행위 전체의 평균 비용을 산출해 미리 정해진 비용을 요양기관에 지불하는 것이다. 지난 2005년부터 시범사업을 거쳐 2008년 본격 도입됐다. 정부는 요양병원 일당정액제를 도입하면서 과잉진료나 불필요한 고가사용 등의 폐해가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요양병원한테는 행정비용 절감 등의 효과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자원소모량 기준의 일당정액수가제가 시행된 이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적정 의료인력과 시설을 갖춘 요양병원은 되레 손해를 보고 최소한의 인력만 갖춘 채 부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만 이득을 보는 기현상이 초래됐다. 일당정액수가는 의사와 간호 인력에만 가감제가 적용될 뿐 다른 직종의 인건비와 약제비, 검사 소모품비 등의 재료비는 모든 병원에 동일하게 지급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검사를 실시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약재만 사용하고, 약사나 사회복지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등의 의료인력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서비스 질이 터무니없이 낮은 요양병원은 돈을 벌고, 시설과 인력을 충분히 갖춘 병원은 경영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자,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맞다. 현재 포괄수가제(DRG) 도입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간 벌어지고 있는 의료의 질 하락에 대한 공방과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요양병원의 일당정액수가제 도입 사례는 현재 전개되는 있는 포괄수가제 논란의 후일담이나 마찬가지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7월부터 제왕절개분만 등 7가지 수술환자의 경우 입원비를 미리 정한 비용만 지불하는 포괄수가제를 병의원급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전면 시행키로 했다. 포괄수가제는 일종의 ‘입원비 정찰제’로 환자가 전액 부담했던 비급여 비용까지 포함해 단일 보험가격으로 정해 지불하는 새로운 진료비 지불제도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포괄수가제 강제적용을 앞두고 의료계가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아직까지 포괄수가제를 강제적용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도 부족하고, 특히 적정수가를 책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행돼 의료의 질 저하가 우려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반면 복지부는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 환자의 진료비 부담이 줄고, 의사의 과잉 진료를 억제하는 효과가 생긴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질병군별로 사전에 책정된 비용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에 의사의 과잉 검사나 진료 행위가 크게 줄어들 것이란 게 복지부의 설명이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포괄수가제란 지불 방식은 나름대로 비용 효율적인 제도이다.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원가 절감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정해진 가격에서 최대의 이윤을 남기려면 원가를 절감하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점은 복지부도 인정한다. 복지부는 최근 기자들을 상대로 포괄수가제 설명회를 하면서 “포괄수가제는 병·의원의 경영효율성과 의료자율성을 높이는 제도이다. 포괄수가제가 강제적용 되면 환자들은 진료비 부담이 줄어들고, 병·의원은 경영효율화를 추구하면서 의료의 질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정책이 정부의 생각대로 이상적으로만 작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정부는 포괄수가제의 도입 근거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선진국의 사례를 제시한다. 우리보다 앞서 포괄수가제를 도입한 이들 국가의 상황을 볼 때 포괄수가제가 과잉진료를 억제하면서 의료의 질이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에서 포괄수가제 이후 의료의 질 하락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이들 국가의 의료시스템이 우리와 상당히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공공의료 비중이다. 통계에 따르면 OECD 국가 공공의료 비중은 70%에 달한다. 국가의료체계를 운영하는 영국은 말할 것도 없도 프랑스와 독일 캐나다 등의 국가는 공공병원 비중이 최소 50%에서 90%에 육박한다.  우리가 의료민영화의 폐해 사례로 손꼽는 미국만 하더라도 공공병원의 비중이 30%에 달한다.

이들 국가는 정부의 관리 아래 놓여있는 공공병원을 중심으로 포괄수가제의 장점인 과잉진료 해소와 의료비 절감이란 효과가 무리 없이 발휘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공병원 비중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90% 이상이 민간의료기관으로 구성돼 있다. 당연히 민간의료기관 입장에서는 수익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복지부가 포괄수가제의 강점으로 제시한 ‘병원의 경영 효율화’ 노력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벌써 일부 병원은 싼 치료재료 구매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또 포괄수가제 적용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래진료를 늘릴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의료원가를 줄이기 위해 입원환자의 조기퇴원을 유도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도 높다. 사실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병원들이 평균 재원일수를 줄여 병상회전율을 높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움직임을 병원의 윤리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민간의료기관 입장에서는 경영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땅 파먹고 사나”라는 항변을 의사의 이기적인 생각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다. 민간의료기관이 과잉공급된 상황에서 치열한 환자유치 경쟁과 저수가로 인한 박리다매식 의료서비스 제공을 할 수밖에 없는 의료환경은 그대로 둔 채 진료비 지불제도만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과잉진료가 해소되고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이상적인 정책 전망을 제시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다.

정부는 진료비 지불제도 개선을 하기에 앞서 공공의료 비중을 확대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지금까지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없이 포괄수가제를 통해 진료비 급증을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손 안대고 코풀겠다’는 심보일 뿐이다. 정부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제시한 선진 국가들이 포괄수가제 도입에 앞서 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나 하는 부분은 왜 모른 척 하나. 무엇보다 요양병원의 일당정액제 부작용 사례가 고스란히 재연될까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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