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진료실 단상>

많은 학자들이 큰 업적을 남기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각종 상이 시상된다. 그러나 그 많은 상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는 상은 역시 노벨상일 것이다. 워낙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만이 그 분야의 노벨상을 타게 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때로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상을 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당연히 의사가 수상을 하던 노벨 생리·의학상을 1979년 영국의 전기 공학자인 가드프리 하운스필드(Hounsfield)가 CT 진단 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미국의 앨런 코맥(Cormack)과 함께 공동 수상하였다. 이는 공학자가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케이스로 기록되고 있다.

반대로 의사가 의학상이 아닌 다른 상을 수상한 경우도 있다. 1980년 12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버나드 라운과 소련의 심장병 전문의 에브게니 차조프는 ‘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를 설립하였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강경 반공주의자인 레이건이 1980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극도로 심각한 대립을 하는 시기였다.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핵전쟁으로 초래될 의학적 장애나 인류에게 미칠 악영향에 관하여 연구하고 핵전쟁 반대를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미국과 소련 의사가 함께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자칫 정치적 이해 관계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오해를 받거나 반대로 본래의 순수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위험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념을 초월해 정확한 의학적 지식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정부 기관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잘 못된 지식으로 인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의학상이 아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4월 한미 쇠고기 2차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은 촛불 시위와 맞물러 사회 전체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4월에 시작된 반대 시위는 연예인들이 시위에 가담하고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2009년까지 이어졌다. 이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주요 뉴스로 다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조류 독감이 발생하여 2003년에는 가금류 500만 마리가 살처분 되었고, 2006년에는 280만 마리가 2008년에는 1000만 마리가 살처분 되어 많은 국민들이 공포에 떨고 축산 농가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급성 바이러스 감염증인 구제역은 2000년, 2002년, 2010년, 2011년에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다.

다행히도 조류 독감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에게 감염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섭씨 75도 정도로 가열하면 바이러스가 사멸하기 때문에 요리만 잘 하면 비교적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구제역의 경우에도 사람에게 감염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또 섭씨 50도에서 사멸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피해는 극히 드물다. 

반면에 신종플루는 2009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에서 발생한 광우병에 대한 보도는 다시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렇듯 여러 가지 질환들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면 여기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에 기반을 둔 정확하고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의사 집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의사협회 정관 2조에 보면 “협회는 사회복지와 국민건강증진 및 보건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의도의 앙양, 의학·의술의 발전 보급, 의권 및 회원권익옹호와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국민건강증진 및 보건향상에 기여하는 방법은 의료 봉사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전국 곳곳에서 의사들이 진료를 하고 있어 더 이상 무의촌을 찾기가 쉽지 않으며, 저렴한 의료 서비스를 위해 여야 모두 복지정책의 강화를 위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시점에서 각 의학 전문 학회와 의협이 국민건강증진 및 보건향상에 기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확한 정보의 제공일 것이다.

문제는 그토록 많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의협이나 각 학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한 기억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신종 플루의 위험을 경고했던 한 대학 교수가 각종 매스컴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많은 기여를 한 적은 있으나 의협이나 다른 단체들의 조직적인 대응은 미약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매몰되어 있을 때 소신껏 발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개인이 그 짐을 짊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따라서 의사협회 혹은 의학회 차원에서 관련 학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신속하게 취합하여 정확하고 중립적인 자료를 정부와 각 언론 기관 그리고 사회단체들에게 제공하여 그들이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아직 우리나라 소에서는 광우병이 발생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예방 차원에서 소의 사료를 렌더링(rendering)하는 것과 같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사회 기여에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렌더링이란 광우병을 유발하는 프라이온 단백질을 파괴하기 위하여 1996년부터 영국 정부에서 도입한 공정으로 사료를 만들 때 134도 이상의 고온 고압 상태에서 18분 이상 가열하는 과정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오직 정확한 의학적 지식만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경우 초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의사들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우리의 풍토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로 충분히 부각된 후에 닭이나 소를 시식하는 행사를 벌이는 것은 전문가들이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198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버나드 라운과 에브게니 차조프의 업적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현석은?

1986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사1994년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수료 및 전문의1998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박사2006년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이사2011년 광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의료커뮤니케이션 박사2011년 한국문화산업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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