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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만성질환 정책, 이대로 가면 대재앙 부른다
  • 김상기 편집부국장
  • 승인 2012.04.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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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05년 '만성질환 글로벌 보고서'란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당시는 고 이종욱 사무총장이 WHO를 이끌던 시기였다. WHO는 이 보고서를 통해 "심장병과 뇌졸중, 암, 당뇨병 등 만성질환으로 연간 3500만명이 죽어가고 있다. 이는 전체 사망자의 60%에 해당한다"고 발표해 전 세계 각국에 만성질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WHO의 보고서 내용은 전 세계 각국의 보건의료 정책 목표의 방향이 더 이상 ‘전염병 퇴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이를 계기로 유엔(UN)은 지난해 21세기 새로운 보건정책의 목표를 심혈관질환·암 등 ‘만성질환’으로 설정했다. 특히 향후 인류 보건정책의 최대 목표를 '전염병 퇴치'에서 '만성질환 관리'로 전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유엔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난해 9월 열린 총회 기간에 비전염성 질환의 예방과 억제를 위한 유엔 정상회의를 소집하고 비전염성 질환 퇴치를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선언문은 각국 정부가 건강한 다이어트와 운동, 작업장 내 금연, 암 검사, 신약 개발을 위한 협력 등을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만성질환을 예방하도록 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보건의료정책의 주요 목표가 만성질환 관리 쪽으로 기울고 있다. 국내 만성질환자 수는 이미 1,0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보건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고혈압 환자 수는 553만 명, 당뇨병 환자는 22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근 발표한 '만성질환자의 의료이용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08~2010년 만성질환자는 전체 의료보장인구의 22.0~22.5%를 차지했다. 전체 의료보장인구 가운데 만성질환자 비율은 2008년 22.5%(1,056만여명), 2009년 22.0%(1,104만여명), 2010년 22.5%(1,138만여명)으로 연평균 ,3.8%의 증가율을 보였다.

질환별로는 고혈압 환자가 41%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신경계질환(21%), 정신 및 행동장애 (19%), 당뇨병(17~18%), 간질환(14~15%) 등의 순이었다. 특히 만성질환자의 진료비는 전체 진료비의 약 31%를 차지했다. 이대로 두면 만성질환자 증가로 인한 건강보험제도의 지속 가능성마저 위협받을 수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문제는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보건의료 정책이 너무나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장기적인 정책 비전을 갖기보다는 건강보험 재정만을 고려한 정책 수립이 대부분이다. 만성질환자와 의료기관이 능동적으로 질병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보다는 그저 의료서비스 이용 패턴을 바꾸는 쪽으로만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최근 도입된 의원급 만성질환 관리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고혈압 및 당뇨병 환자가 의원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을 경우 진찰료 본인부담을 일정액 경감시켜주는 주는 것이 핵심이다. 고혈압, 당뇨병 환자를 지속적으로 적정하게 관리하는 의원에는 인센티브도 지급된다. 하지만 이 제도의 이름이 왜 만성질환 관리사업 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고혈압 및 당뇨병 환자에 대한 진료비 할인 정책일 뿐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혈압과 당뇨병 환자들을 그저 정책의 수혜자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만성질환자와 동네의원들이 능동적으로 질환관리와 예방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보다는 단지 진료비 할인과 인센티브란 당근을 제시해 동네의원으로 유인하겠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정책적 비전도 없다.

동네의원들 입장에서도 굳이 고혈압, 당뇨병 환자를 등록해 관리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만성질환자에게 필요한 관련 정보제공이나 상담 및 교육, 자가측정기 대여, 합병증 검사주기 알림서비스 등 건강지원서비스는 건강보험공단이나 보건소가 제공하기 때문에 의원에서 하는 역할이란 게 그저 환자를 등록해서 진료비 할인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고혈압과 당뇨병 환자가 진료를 받으러 내원했는데 감기나 다른 질병으로 찾아올 경우에는 진료비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들 질환은 합병증 관리가 상당히 중요하지만 제도 자체가 동네의원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고혈압과 당뇨에 관한 약 처방만 하라는 것이다. 만성질환 관리제란 이름이 무색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보건의료 정책간 모순적인 충돌이다. 복지부는 지난해 10월부터 경증질환자의 대형병원 쏠림현상을 막아 의료전달체계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경증질환 약제비 차등화'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약제비 본인부담률이 차등 적용되는 대상 질병에 당뇨병을 포함시켰다. 그 결과 종합병원이나 상급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당뇨병 환자 가운데 약값 부담을 느낀 일부 환자들이 동네의원으로 많이 옮겨갔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당뇨 합병증 때문에 종합적인 관리가 필요한 환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당뇨 합병증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대형병원 이용 문턱만 높인 꼴이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 환경은 급성기질환 치료 중심으로 조성돼 있다. 현행 건강보험이 대부분 급성기질환 중심으로 짜인 탓에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일상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진료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병의원에서 만성질환자를 적극 관리하고 싶어도 보험급여와 수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성질환자의 건강행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에 맞춰 보험급여의 재설계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만성질환 관리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의료비 절감과 재정안정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만일 지금과 같은 정책이 계속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만성질환이 '21세기판 페스트'가 될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 될지도 모른다.

김상기 편집부국장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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