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재정 확대 따른 보건경제학 필요성 높아져…"정책 수립시 적극 반영돼야"

“보건의료 환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보건경제학자들 때문에 환자만 피해를 입는다”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 교수의 말이다.

 

그는 “보건의료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이 경제학을 더 공부해 보건경제학자로 활동하면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며 “지금 보건복지부에서 보건경제학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약사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보건경제학은 1970년대 생긴 학문으로 한정된 보건의료분야 자원을 경제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결정하는 학문이다.

세계보건경제학자협회 회원은 350여 명이다. 그 중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는 3명이고 의사 출신 학자는 1명에 불과하다.

국내에는 90년대 초반에 한국보건경제정책학회가 설립됐고 현재 150여 명의 회원이 소속 돼 있지만 회원 대부분이 경제학이나 행정학 분야의 전문가들로 보건의료 전문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보건경제학의 역사도 짧고 인력풀도 취약한 탓에 보건의료 정책 수립과정에 미치는 영향도 아직은 미미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보건복지 정책과 예산안 수립 과정에 많은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그 중 보건의료 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경제성을 평가할 수 있는 보건경제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 선임연구원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정부기관이 보건의료 관련 정책을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보건경제학자는 10명에서 20명 정도”라며 “그 중 의사출신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 연구원은 “보건경제학이 70년대 만들어진 학문이기 때문에 국내에 보건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의사이면서 보건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수가체계, 의료서비스, 신약 등의 분야는 의사라는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외국의 경우 보건의료 관련 정책을 도입하기 전 안전성, 유효성 뿐 아니라 경제성도 평가한다.

 

예컨대 영국은 연간 50만 파운드가 드는 어린이용 방수 약품보관사업을 검토하다 포기했다.

 

이 사업을 하지 않았을 때 연간 1만 6000 건의 병원입원과 입원 당 30파운드의 비용이 든다면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 연간 2만 파운드 이익이라는 보건경제학적 분석을 근거로 내린 결정이다.

 

최근 국내에서는 로봇수술을 놓고 비용편익에 따른 유효성 논란이 불거졌다.

 

모 대학병원 B교수는 “우리나라만큼 수술용 로봇을 많이 보유한 나라도 없다”며 “갑상샘암의 경우 로봇수술은 500~600만원이 들지만 내시경 수술을 하면 100만원이면 되고 위암 수술도 복강경 수술과 로봇수술은 비용이 5배가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병원들이 최신 기계를 도입하지지 않으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수술용 로봇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B교수는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도입 탓에 우리나라 수술용 로봇 가격은 외국보다 10억 원 이상 비싼 30억 원 선에 판매된다"며 “경제성과 환자 편익을 고려한다면 정책적으로 필요한 만큼만의 수술용 로봇을 전국에 골고루 배치토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건의료 분야 정책을 수립할 때 안전성, 유효성, 경제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며 “보건경제학자들이 원가계산과 분배 그리고 정책수립 방향 등을 보건경제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배워 올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도 점점 보건의료비 지출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만큼 전문성을 갖춘 보건경제학자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보건행정학회 사공진 회장은 “경제학 중에도 보건경제학은 범위가 무척 좁다”며 “국내 보건의료 시장 자체가 작다 보니 활동하는 보건경제학자도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공 회장은 “미국은 보건의료시장이 충분히 형성 돼 있고 기업 투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며 “시장이 커지다 보니 보건 의료분야 경제성 평가 뿐 아니라 시장 흐름을 예측하는 역할을 하는 보건경제학자 배출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보건경제정책학회 정형선 회장은 “캐나다는 보건 분야 비용을 충분히 조사해 만든 국민보건건강계정 덕분에 적은 의사 수로 효율적인 의료행위가 가능하게 했다”며 “보건경제학자의 전문적인 분석이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의료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춘 보건경제학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인력 양성 방법으로 미국 하버드 의대의 교육 방법을 추천했다.

 

하버드 의대는 병원 CEO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재학 중 1년간 MBA코스를 권장하고 있다. 의대를 다니면서 의료 뿐 아니라 돈과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전문성을 가진 보건경제학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다만 미국에서도 의사 출신의 보건경제학자가 정책 결정에 참여할 경우 지나치게 의사 중심의 보건의료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의료서비스의 수요가 의사의 진료와 처방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시장을 제대로 알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는 보건경제학자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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