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이 용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 군주 하의 전제적 지배체제를 의미하는 말로, 흔히 구체제(舊體制)라고도 통칭된다. 또한 이 말은 새로운 체제와 비교해 이전 제도의 낡은 특징을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타파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의미로도 쓰인다.

최근 보건의료 분야에서 ‘앙시앵 레짐’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내년이면 우리나라에 건강보험이 도입된 지 35주년이다. 딱 그 기간만큼 의료공급자는 물론 의료소비자들도 ‘저부담·저수가·저급여’로 대변되는 국내 보건의료 체계에 염증을 느껴왔다. 그래서 제한적인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보다 쉽게 양질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의료시스템으로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보건의료체계의 앙시앵 레짐을 깨뜨리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그 기저에는 ‘무상의료’가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 무상용어란 단어는 그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되레 상황을 왜곡시키고 있다. '무상'이란 용어의 사전적 의미 때문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모든 국민이 공짜로 의료서비스 혜택을 누리도록 만들자는 것이냐며 역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건강보험 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 재정을 기반으로 50~60% 수준에 불과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90% 이상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제’를 적용해 고액·중증질환자의 과다한 진료비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 무상의료의 핵심이다.  무상의료 논의에서 항상 걸림돌이 되는, 혹은 이에 반대하는 집단이 단골로 내세우는 논리가 ‘대체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현실성 없는 복지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맞고 한편으로 틀렸다. 정치권에서는 무상의료 실현을 위해 추가로 소용되는 재원을 놓고 ‘수 십 조원이다’, ‘아니다 수조원이면 된다’ 하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추가 재원의 규모는 가격탄력성을 얼마로 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특히 비급여 항목에 대한 정확한 규모가 확인되기 전에는 추가 재원 논쟁은 무의미할 뿐이다.

당연히 무상의료, 엄밀히 말해 ‘건강보험료 기반의 본인부담 없는 의료서비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입자의 추가적인 보험료 부담이 뒷받침 돼야 한다. 이미 무상의료를 실현한 독일만 보더라도 가입자들의 보험료 부담이 만만찮다. 우리도 무상의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가입자들의 추가적인 비용 부담이 필수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건강보험료 기반의 본인부담 없는 의료서비스’가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복지 포퓰리즘은 아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이를 실현한 국가들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료율이 OECD 국가 평균에 많이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건강보험제도도 ‘저부담·저수가·저급여’의 앙시앵 레짐을 깨고 ‘적정부담·적정수가·적정급여’ 체제로 전환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물론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적정부담이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가 보건의료미래위원회에 보고한 ‘보건의료 정책 방향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보장성이 확대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보험료 부담이 늘어나는 것에는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무상의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적정부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주목할 것이 바로 ‘건강 레짐(health regime)’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창엽 교수는 “무상의료는 반드시 보건의료 제공체계를 포함해야 하며 건강수준의 향상 및 이를 위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보건의료 이용에 연관된 가치체계와 문화까지 포괄해야 한다"며 “이런 맥락에서 정책, 체계, 제도, 건강보험, 의료보장 등의 개념을 넘어 ‘건강 레짐’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더 이상 무상의료란 용어에 집착해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선 안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건의료 서비스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정치와 가치체계, 문화, 사회구조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부담을 더 지더라도 모든 국민이 필요할 때 적절한 의료서비스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강 가치체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때 비로소 무상의료가 꿈이 아닌 단단한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도 이젠 건강 레짐을 위해 머리를 맞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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