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격 /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언젠가부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살아온 날을 곱씹어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삶을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반환점을 돌던 무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보니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입니다.

산업화 시대와 달라진 정보화 시대의 신흥 지배 엘리트를 분석한 책 <보보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삶이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었던 저자는 <보보스>에서 자신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조망한 바 있습니다. 그 역시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내적으로 풍요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먼저 인간이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소개하고, 과거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극복하고 도덕적 삶을 추구하던 사회가 이제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성공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모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또한 그런 변화가 초래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다시 과거의 전통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명제를 각각 <인간의 품격>의 맨 앞과 맨 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저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 인물 아홉 명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자에게 영감을 준 아홉 사람은 빈민운동가 도러시 데이, 작가 새뮤얼 존슨, 성 아우구스티누스, 미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인권운동가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킨, 전 미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 소설가 조지 엘리엇 그리고 전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 등입니다.

서구사람들은 기독교적 겸양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삶을 중시해왔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부닥친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가치관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해야 하는 삶의 방식에 회의하게 되었고, 전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을 즐기자는 풍조가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정도가 지나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보고 있고, 적어도 일정 부분은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간단한 실험자료를 보더라도 이런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1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물었는데, 12퍼센트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9년에 같은 질문을 받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 가운데 남학생은 80퍼센트, 여학생은 72퍼센트가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때문인지 기독교에도 역시 변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시대로부터 인간은 나약하고 결함투성이인 존재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고 세속적인 성공을 거부하며, 신의 은총을 믿고, 분에 넘치는 신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도덕적 실재론의 전통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는 도덕적 실재론이 물러나면서 변화가 일고 있다고 합니다. 휴스턴의 조엘 오스틴 목사는 ‘더 나은 자신이 되라’라면서 “신은 당신을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현 세대에 자취를 남기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29쪽)”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 승리하며 살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하라고 권유한다는 것입니다. 시류의 변화에 편승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기는 보수적인 가톨릭이 교리의 해석을 교황청으로 일원화하는 것과는 달리 진보적인 기독교에서는 성직자마다 자유롭게 교리를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겸양을 바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결함을 찾아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과거의 겸손의 미덕을 ‘리틀 미(Little me)’라고 한다면 자아도취적 심리에서 스스로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기과잉시대의 미덕을 ‘빅 미(Big me)’라고 저자는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빅 미(Big me)’의 풍조는 여성해방운동이나 소수자 인권운동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권익을 찾아주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자아도취적 사고가 만연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성공지상주의가 확산되면서 남이 하는 모든 일을 나도 이룰 수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무한경쟁이 촉발된 것입니다. 스스로를 다스려 내적 진실성과 도덕성을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멀어지면서 타인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온고지신(溫故而知新)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옛 것에서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기에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홉 사람이 살아온 삶을 간략한 전기형식으로 요약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찾아낸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정리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분명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함을 채우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홉 분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모두 짚어보고 싶습니다만,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요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물론 보는 사람들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겠습니다만, 저 역시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냈던 조지 캐틀렛 마셜장군의 삶을 보겠습니다. 남부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마셜장군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야 했습니다. 공부도 뒤처지고 지나치게 사람들을 의식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실수가 이어지면서 말썽꾸러기 문제아라고 치부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사관학교로 진학할 무렵부터는 생각을 바꾸어 자신이 모자라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재학생들에게 영웅에 대한 존경심과 금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학교 생활을 통하여 마샬은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기작가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샬의 일생에서 도덕적 실패의 순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군에서 보낸 마셜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설적인 조직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이 준비한 프랑스 탈환작전의 지휘관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모두들 마셜장군이 맡아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인 역시 그 역할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정작 루스벨트대통령이 그의 뜻을 물었을 때 마셜장군은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역시 마셜장군이 적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셜이 유럽에 있는 지휘소로 부임하여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불안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이젠하워에게 그 임무를 맡겼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후일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셜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 맡은 유럽복구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마셜장군의 삶에서 저자가 얻어낸 지혜는 “고결한 지도자는 자신의 본성으로 국민들에게 커다란 혜택을 주는 일을 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과하고 공적 기능을 행하는 데 스스로를 헌신한다.(233쪽)”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흑인 인권운동을 선도한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틴의 삶 역시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비폭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권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대결과 다툼보다는 교육과 화해를 옹호하던 기존의 인권단체와는 달리 이들은 점거농성이나 시위 같은 적극적인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시위방식에 대한 랜돌프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저항이 우리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 우리는 폭력을 흡수하고, 테러리즘을 흡수하고, 우리 행동에 따르는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251쪽)” 랜돌프의 이런 방침은 그의 보좌관이었던 러스킨의 행적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42년 내쉬빌을 방문한 러스킨은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분된 버스에서 백인석에 앉겠다고 고집하였고, 버스기사가 부른 경찰이 달려와 그를 구타를 하는 동안에도 수동적으로 방어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운동이 폭력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고, 폭력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본말이 전도된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사회운동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랜돌프와 러스틴의 삶을 비교해보면 공적인 부분과 개인적 부분에서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이른 시대를 살았던 랜돌프는 불의에 맞서 싸우면서도 스스로 해이해지거나 죄를 짓게 될까 봐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청렴결백하고, 말을 삼가고 격식을 갖추는 모습 등 존엄성으로 그를 모욕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추종했던 마르크스주의와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노동현장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는 조직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격렬하게 대립하기까지도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러스틴은 20대 후반에 이미 전설적인 시민운동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러스틴은 영웅적으로 행동했지만 간혹 오만과 분노가 묻어 있었고, 자신이 공언한 신념체계에서 벗어나는 무모한 행동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표면화되지 못하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내기까지 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성적 파트너를 찾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성애적 취향보다는 성적 문란함이 문제가 되어 시민운동의 전면에서 퇴장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역시 사회적 지도자가 되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도 소명의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소명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설명하는 소명 혹은 특별함의 의미는 그야말로 특별한 것 같습니다. “내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살기 위해 태어났다. (…)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삶을 사는 의미가 없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내 나름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444쪽)” 즉 특별하다는 것은 남들과의 경쟁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특별함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도덕적 환경이 조성됨에 따라 자기도취와 자기확대 성향이 강조되는 외적인 삶에 무게가 실려 왔다면 이제는 우리가 소홀하게 생각했던 내적인 삶과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모두 열다섯 가지 겸양의 규칙을 형성하는 일반적 명제를 정리해냈습니다. 적어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잊었던 진실이기도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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