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존 러스킨 지음 /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펴냄, 2010년

[라포르시안] 얼마 전에 요즈음 유행한다는 날씬해보이는 바지를 사러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바지도 넉넉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생각나서 여유가 있는 바지가 다시 유행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축성 있는 소재가 좋아지고 있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꼭 유행이 돌고 도는 것은 아마도 옛것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이 말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옛 것을 파악하여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고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나오는 “記問之學 不足以爲師矣(기문지학 부족이위사의)라는 구절을 새기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온고지신’과 ‘기문지학’에서 옛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 속에서 현재나 미래에도 잘 맞는 새로운 이치를 깨치는 것이야말로 학문하는 자세라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예전에 문제가 있어 버려졌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유익함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임신으로 생긴 입덧,  두통, 불면증, 식욕저하 등을 개선하는 효과가 기대되었던 탈리도마이드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시판 후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Phocomelia Syndrome)을 가진 기형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폐기되었던 탈리도마이드는 그 작용기전이 밝혀진 최근에 새로운 유용성이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치료가 어려운 다발성 골수종 환자에서 탈리도마이드를 다른 항암제와 같이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하는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Book소리에서도 이미 소개한 <건축의 일곱 등불>과 <베네치아의 돌>을 통해 친숙해진 존 러스킨이기도 합니다. 두 작품만을 놓고 보면 존 러스킨을 미학자로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건축과 장식예술 분야에서 고딕 복고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대중의 예술기호에 큰 영향을 미친 존 러스킨(1819-1900)은 작가이자 화가, 예술비평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로, 예술은 물론 문학, 자연과학(지질학과 조류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 천재였습니다. 이와 같은 러스킨의 행보에 관하여 ‘다양한 관심이란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공부를 위해서 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다음 백과사전, 러스킨)’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순수 미술에 대한 러스킨의 날카로운 비평은 대부분 35세 이전에 쓰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세를 넘어설 때까지도 그저 예술애호가 정도로 대접받았습니다. 19세기말 들어서야 러스킨의 예술적 견해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지만, 이미 1860년대부터 러스킨의 관심은 예술비평에서 정치경제·사회경제 분야로 옮겨간 뒤였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1862년)> 역시 이 무렵에 쓴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7년 먼저 발표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정통파 경제학의 대척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말미에 ‘마법의 책, 마법의 주문’이라는 제목으로 쓴 간디의 수필을 싣고 있습니다. 간디는 이 책을 읽고 다음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1. 개인의 이익이 모든 사람의 이익보다 우선될 수 없다, 2. 노동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변호사의 직무나 요리사의 직무나 그 가치는 동일하다, 3. 농부의 삶과 직공의 삶과 같이, 노동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다.(221쪽)” 간디의 이러한 깨달음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면 깨달음을 얻어 행복한 공동체를 이뤄가자는 사르보다야(Sarvodaya) 운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4편의 논문은 출간하기 1년반 전에 콘힐매거진에 연재된 것들인데, 연재하는 동안 대부분의 독자들로부터 거친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는 러스킨의 연재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잡지불매운동까지 일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킨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하건대, 이 논문들은 내가 지금껏 써왔던 어떤 글들보다 훌륭하고, 진실하며, 필요한 말들만 사용했고, 또한 사회에 유익을 주는 글이라 믿는다(7쪽)”라고 술회하였습니다.

각각 ‘명예의 근원’, ‘부의 광맥’,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가치에 따라서’라는 제목을 단 4편의 논문을 통하여 러스킨은 ‘부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논하였습니다. 다만 노동의 재편에 관한 주제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성립된다면 쉽게 풀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국가 전역에 걸쳐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가 정부예산과 감독 하에 설립되어야 한다. 둘째, 직업훈련학교와 연계되어 정부의 전적인 관리 하에 각종 생필품의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모든 산업에 유용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공장과 공방이 설립되어야 한다. 셋째, 남자든 여자든, 혹은 소년이든 소녀든, 누구든지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바로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직업훈련학교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년층과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택과 함께 안락한 생활이 제공되어야 한다. 아마도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사회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창출되는 부가 지주계급과 자본가에서 편중되지 않도록 하자는 개념을 담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명예의 근원’에서 저자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논합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변수는 한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 양태를 ‘득실의 균형’이라는 해석논리로 귀납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제한 러스킨은 ‘득실의 균형’이 아닌 ‘정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을 향한 조물주의 의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정의’라는 단어는 한 사람이 타인을 향해 품는 ‘애정’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즉, “고용주와 고용인이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최대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정의와 애정.(32쪽)”이라는 것입니다. 소속 노동자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고용주는 특별히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노동력이 넘치는 상황으로 유능한 노동자마저도 부당한 임금을 받고 있었던가 봅니다. 러스킨은 동일한 노동 분야 임금의 평등화야 말로 우선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고 하였고, 이어서 시장의 불규칙한 변동에도 불구하고 일정 규모의 노동자를 유지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지라고 하였습니다. 일종의 고용안정화를 주장한 셈입니다. 무능한 노동자가 선도하는 저임금 때문에 유능한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임시직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46쪽)’라는 설명은 나름대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노동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정규직으로 진입한 사람들은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일삼으며, 새로 정규직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 높은 장벽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하거나 심지어는 자리를 세습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최근에 의료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선택진료제도의 폐지와 연관지을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의사와 갓 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내리는 진단의 차이는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울인 전문적인 능력이나 이후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 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라고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같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실력에 상관없이 동일한 사례를 지불하고 있다.(44쪽)’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영국의료제도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희생에 대한 대가는 의사에 대한 존경이었다고 하는데, 요즈음 우리사회가 의사를 존경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러스킨은 구성원 간의 애정지수가 증가함에 따라 얼마간의 보편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당시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부는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질타하였습니다. 러스킨이 보기에 부자가 되는 기술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서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는 것(73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사회 구성원 간의 부의 불평등이 국민들에게 유익할지 유해할지는 논리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유보하였습니다. 다만 부당한 방법으로 발생한 부의 불평등은 그것이 사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과정 중에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았습니다. 부의 참된 가치는 물리적 수량을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기호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합니다. 꾸준한 노력, 능동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생산적인 창의력 등을 도덕적 기호로 본다면, 극도의 사치나 무자비한 횡포, 혹은 타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사기 등은 부도덕적인 기호로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결국 ‘정의’로 귀납된다고 합니다. 러스킨은 부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지배력에 근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돈의 지배력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지배를 받는 사람이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또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부의 가치가 증대한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칼을 든 병사만이 아니라 호미를 든 병사도 필요하다.’ ‘통치와 협력은 만유의 생명의 법칙이고, 무정부 상태와 경쟁은 만유의 죽음의 법칙이다’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은 사유재산권을 무효화하자는 사회주의 사상과는 단연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당시에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음을 공론화되어온 것처럼 부자들 역시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수 없음을 공론화되기를 소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논문 ‘가치에 따라서’에서는 밀과 리카도 등 당시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비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물품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유용성’과 ‘선호도’이고, 그 물품을 부의 척도로 삼으려면 반드시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149쪽)”라고 하는데, 러스킨은 유용성과 선호도는 그 물품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숫자와 성향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부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인간의 역량과 성향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이 정의하는 부는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소유된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를 평가할 때는 ‘소유재산의 가치’와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역량’이라는 두 개의 잣대를 공평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생명이 곧 부(富)다”라는 심오한 진리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 바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195-196쪽)”라고 한 러스킨의 말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지속발전을 위하여 부를 서로 나누고 뒤에 올 사람들까지도 챙기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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