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처럼 살라 / 박홍순 지음 / 한빛비즈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아무리 좋은 일도 일상이 되면 심드렁해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지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빨리빨리’문화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반작용으로 ‘느림의 미학’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박홍순 작가의 <소로우처럼 살라>를 받아들었을 때의 첫 느낌은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려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인적이 드문 숲속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하며 산책을 하거나 사색에 잠긴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라고 서문의 첫머리는 무언가 더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숲 속에서의 생활 자체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한 이유다.”라는 대목에서는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소로우가 제시한 삶이 현대의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이 태동하는 모태가 되었다고 보았고, 그가 선보였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형태의 저항을 민주주의 선거절차가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부정의한 법이나 정책에 대한 저항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저자 박홍순은 지금까지 다수의 저작을 통해 미술, 철학, 종교, 역사 등 다양한 분야와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해왔다는데, 아무래도 제가 어려워하는 분야이다 보니 그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소로우처럼 살라>가 처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인문학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의 학문적 배경은 역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독서와 집필이 곧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들을 엮어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설하고 저자는 한국 사회가 소로우에 관심을 가지고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다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이른 바 근대화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우리는 서구 문명이 제공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틀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꿰어 맞추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즉, 압축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을 해소하는데 있어 소로우의 사상이 가장 적절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에 대한 태도, 자유로운 삶의 전망, 불복종을 통한 저항이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소로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적한 한국적 성장의 폐해가 낳은 문제처럼 저자 역시 소로우의 사상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루 다루면서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 즉 나름대로 정한 목표에 부합되는 내용들을 모아 꿰어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저자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읽고, 두 번째에는 비판적으로 읽으며, 다음에는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서 재해석하면서 읽는 방식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주제 ‘자연과 함께 하는 삶’부터 시작해볼까요? 이 주제 안에서 저자는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고, 문명 밖에서 문명을 성찰함으로써 생태적 사고와 삶의 지평을 열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1845년 3월말 경,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하여 소로우는 도끼 한 자루를 (빌어서) 들고 숲으로 향했고, 월든 호숫가 언덕배기에 집을 한 채 지었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서 입주를 한 것은 7월 4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이에 주변에 텃밭을 갈아서 씨를 뿌렸습니다. 다만 경작을 했다기보다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린 것이 전부였고 김매기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은 자연이 키워낸 것입니다. 한해 농사를 마무리할 즈음에 정산해보았더니 일용할 식량이 남았다고 적었습니다.

소로우에게 있어 자연에서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삶의 여유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삶, 실감을 느끼기 위하여 보통의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일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퇴직을 하면 손에 남는 것은 퇴직금 몇 푼과 집 한 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자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보신 적은 있는가 싶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적 경험한 바로, 시골에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일을 나가서 해가 져서 어두운 다음에야 집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습니다. 종일 논과 밭에서 고되게 일을 해야 한 해를 버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로우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책을 읽고 사유하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네 농촌 사정은 소로우가 살던 시절의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씨만 뿌리고 내버려두면 과연 가을에 손에 들어오는 수확물이 얼마나 될까요? 모르긴 해도 한 끼 밥을 지을 식량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남산골 샌님들은 냉수만 마시고도 글을 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옵니다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적 여유를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월든>에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뉴잉글랜드 지방에 처음 도착한 이민자들은 집을 짓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다음 추수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굴을 파서 임시로 거처할 움막을 짓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하나 짓고, 봄에는 널려 있는 공터를 갈아 씨를 뿌리고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2년여 보낸 끝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와 그 곳에서 지낸 2년여의 삶에만 주목할 뿐, 왜 그가 숲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였는 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실 월든 숲으로 들어간 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소로우는 전제한 바 있습니다. 즉, 인류의 발명과 근면성이 가져온 편의는 분명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인류는 여전히 그 옛날처럼 소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숲 생활의 첫 번째 해는 끝이 났다. 그다음 해도 첫해와 큰 차이는 없었다. 1847년 9월 6일 나는 드디어 월든을 떠났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54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월든에서의 생활을 정리합니다. 즉, 실험이 끝났기 때문에 떠났던 것입니다.

맺음말에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 놀라운 일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1-462쪽, 이레, 2010)” 소로우의 선택이 개인적으로는 생태주의 삶을 실험하는 장소가 아니라 과학기술에 기초한 생활방식이 인간에게 강제하는 노예적 삶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는 저자의 설명은 지나쳐 보입니다. 소로우의 삶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소로우는 어디에서도 문명의 발전을 거부하고 야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바 없습니다만, 저자는 문명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료기술이야말로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직까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인플루엔자 치료를 예로 들어 의료기술의 발전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고 특정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이 개발돼야 치료효과가 있다. 세상에 모든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개발되어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주제인 ‘자유로운 삶’ 역시 ‘나는 구속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는 <월든>의 한 대목에서 이끌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로운 삶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점보다는 누군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정규직문제에서도 동일한 시간노동에도 임금이 싸고 각종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적었지만, 원칙적으로는 비정규직에게도 4대 보험을 보장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근무시간의 단순비교보다는 근무강도나 근무의 내용도 논의되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시장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에서는 세계가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사회의 구성원을 위하여 보호무역, 통제된 시장을 운용하는 것으로 과연 지속가능한 성장은커녕 현상유지조차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인 ‘저항,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삶’은 소로우의 ‘불복종을 통한 저항’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사회의 규범에 불복종하는 행위는 소로우보다 먼저 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치가 오노레) 미라보(1749~1791)는 ‘사회의 가장 신성한 규범에 공공연히 대적하는 일에 가담하려면 어느 정도의 결의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상에서 강도짓을 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인용했습니다. 그 신성한 규범이 정의로운 것이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소로우는 미국 정부가 텍사스의 병합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을 탄압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세금의 일부를 납부하지 않았고, 정부는 이러한 소로우를 감옥에 가둔 바 있습니다. 소로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불복종을 통한 저항을 내세우게 됩니다.

저자는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시민 불복종이 법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을 일축합니다. 문제가 있는 정책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언론을 통하여, 혹은 관련법의 개정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론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나치의 지도부는 그렇다고 쳐도 독일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대규모 학살의 공범 혹은 방관자가 되었다고 설명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고발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라고 했는데(191쪽),  이런 설명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라는 이유로 괴로워하던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칠 무렵에 나온 것으로,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였습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89-110쪽, 열린책들, 2014년)

다수가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고 본다면, 마찬가지로 시민불복종을 주도하는 사람 역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로우 역시 “사회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의무는 아니다. 자기 내부의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견지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민불복종 또한 개인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우의 자연 안에서의 여유로운 삶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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