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 / 토니 주트 지음 /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유럽근대역사를 전공한 뉴욕대학의 토니 주트 교수는 최근 '북소리'에서 소개한 <기억의 집>과 <20세기를 생각한다>를  통해 만나본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4년 전에 출간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통하여 처음 만났는데, 자유시장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한 공산주의에 대하여 공히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이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반대의 이념에는 비판적이지만 자신이 믿는 이념을 바라볼 때는 너그러운 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현상에 대한 논평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만, 저자와 같이 냉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해결방안이 도출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의 집필의도에 관하여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라고 전제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토니 주트 지음,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237쪽, 플래닛 펴냄, 2011년)”라고 변화를 위한 적극적 행동을 주문하였습니다. 저자가 “이 책은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다.”라고 밝힌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이 싹을 틔워 성장하고 소멸한 유럽대륙과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중심이 북미지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재평가>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저자가 다양한 잡지에 서평형식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통상적인 서평에 비하여 호흡이 긴 글인데, 비평의 핵심이 되는 저서 뿐 아니라 관련된 책은 물론 연관이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하여 비평이 비판에 머물지 않도록 안배를 하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 과거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배워야 할 흥미로운 무엇이 없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한다”라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재평가(再評價; Reappraisals)'의 사전적 의미는 이미 평가된 것을 다시 평가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평가에 잘못은 없는지 다시 곱씹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비판의 수위를 고려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책의 핵심은 잔인하지만, 부당하지 않다. 특히 정치적 우둔으로 치장한 20세기 문단의 신사 숙녀들에 대해 상기시킨다.”라고 쓴 뉴욕 타임스의 평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평이 발표된 다음에 특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맨 끝에 짧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서평에 이은 논쟁을 별도로 소개하기도 하였고, 격렬한 반응을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글은 마이클 오런이 6일 전쟁을 새롭게 쓴 책의 서평으로 2002년 7월 <뉴 리퍼블릭>에 내가 기고한 마지막 글이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단일국가해법에 관한 글 때문에 이 잡지의 발행인 란에서 내 이름은 사라졌다. 서평의 논조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는데도, 마이클 오런은 (아마도 이견이나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이상하게도 욕설이 섞인 인신공격적 반응을 보였다. 그 글은 <뉴 리퍼블릭> 2002년 9월 30일 판에 실렸다.(367쪽)”

저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작가들의 입장이나 이스라엘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폭탄주를 제조하는 사람이 먼저 마셔서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부 어둠의 심장’에서 다룬 아서 케스틀러, 프리모 레비, 마네스 슈페르버 그리고 해나 아렌트는 모두 유대인입니다. 아서 케스틀러의 경우는 데이비드 시저러스의 <아서 케스틀러; 정처 없는 영혼>에 대한 서평으로, 프리모 레비의 경우는 <프리모 레비; 어느 낙관주의자의 비극>에 대한 서평으로 쓴 글이며, 마네스 슈페르버와 해나 아렌트의 경우는 회고록 혹은 글모음에 대한 서평입니다. 비판의 대상에 대하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면서도 비판할 부분은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돌직구를 날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토니 주트는 케스틀러의 사생활이 타인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스스로 공산주의에 빠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의 범죄와 과오를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해석합니다. “(아서 케스틀러의 <한낮의 암흑>)은 대중 독자층에게는 공산주의를 가혹한 독재정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실과 논거, 재판을 조작하는 거짓말이자 사기로 제시했으나, 식별력을 더 갖춘 지식인 독자층에게는 공산주의를 가혹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기묘하게도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제시한다.(84쪽)”

프리모 레비에 대한 글에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의 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자신이 생존자였던 빅터 프랭클박사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생존자들은 ‘살아남았고, 다른 이들이 겪은 절망적인 고초를 전달하지 못했으며, 깨어있는 매순간 증언과 회상에 전념하지 못했다’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생존자들은 ‘마음속에서는 수용소를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레비가 말년에 남긴 ‘생존자’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내면의 고통이 읽힙니다. “물러서라. 나를 내버려두어라. 어둠에 빠진 자들이여 / 사라져라. 나는 누구에게서도 무엇을 빼앗지 않았다. / 누구의 빵도 강탈하지 않았다. / 아무도 내 대신 죽지 않았다. 아무도.(…)(103쪽)” 살아 돌아온 사람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압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레비 역시 68세 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회고록에 대한 서평에서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편의성을 취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스탈린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과 마르크스가 예언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성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려는 알튀세르의 노력은 차라리 애처로울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에 대한 서평에서는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재앙과 같은 잘못에 눈을 감고 공산주의를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홉스봄이 악을 직시하기를 거부했고, 악을 악이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며, 스탈린 등이 한 정치적 유산은 물론이고 도덕적 유산에 대하여 언급을 피함으로써 미래의 진보주의자들이 오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좌파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안에 있는 악마 공산주의자들과 대면하기를 회피했을 뿐 아니라, 반공주의에 대한 무작정의 반대는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정치적 사고를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좌파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일어서려면, 과거에 관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얘기는 그만 두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저자의 이와 같은 논지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목이라서 실감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3부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잘못된 정책을 선택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루마니아 그리고 이스라엘 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전개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프랑스와 같이 두 꼭지를 할애하여 깊이 다루었습니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기억의 집>에는 젊은 시절 방학을 이용하여 방문한 키부츠에서 얻은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의 문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집단 자치 정부를 꾸렸다거나 소비재를 평등하게 배급한다고 우리가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타인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자부심이 극단에 이를수록 가장 악질적인 인종적 유아론만 강해질 따름이다.(토니 주트 지음, 기억의 집, 103쪽, 열린책들, 2015년)” 

사방이 이슬람국가들로 둘러싸인 조국을 지켜야 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풍전등화 신세의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국민 각자의  몫을 줄여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967년 벌어진 ‘6일 전쟁’이 세계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뒤 이스라엘 내각은 영구 평화를 대가로 점령지를 반환한다는 원칙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은 이행되지 않았고, 점령한 땅을 계속 점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랍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추방되거나 도피하여 이스라엘로 유입되고 있고,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한 처지가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같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들에 대하여 통행금지, 가옥파괴, 토지 강탈, 총격, 표적 암살, 장벽설치 등,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 아랍제국들 모두에게 좋은 중동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결국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건설했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정착한 초현대적 사회라는, 어렵사리 쌓아올린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바뀌어 식민점령국에 인종차별을 일삼는 나라라는 정도의 비유는 진부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박해받는 소수민족이며 희생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청년들에게 이스라엘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비교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주요 정착촌을 해체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조건없이 협상을 재개하고 팔레스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모음집에 대한 서평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민족일국가주의(二民族一國家主義)를 내세웠습니다.

쿠바위기에 관한 서평을 읽다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정책에서 미국이 갈팡질팡한 속내가 가늠되기도 합니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D. G.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沖繩]-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하며, 타이완,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등은 이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고 그들 지역들은 국제연합(UN)의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극동에서의 미국방위선 구상을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북한이 남침을 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북한의 남침이 현실이 되고, 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자 미국은 곧바로 국제연합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연합군을 투입하였습니다. 트루먼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소련이 독일의 분할된 국경선을 넘기 위하여 한국전선을 전략적 시금석으로 시험해보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23개나 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거침없는 비평을 쏟아내고 있어 깔끔하게 요약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쉽게 읽히고 이해가 된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보수와 진보가 양보 없는 대치국면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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