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기의 즐거움 /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2년 전 아내와 함께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길을 찾아다닐 무렵,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의 <걷기예찬>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걷기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라도 받으면, <걷기예찬>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는 구절을 꼭 인용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양기화, 아내와 함께 하는 주말걷기, 신동아 2012년 12월호, 356-359). 브르통교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사회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몸’의 문제를 천착하여 <몸과 사회> 등 많은 저서를 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걷기예찬>은 단순한 산문집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고 진지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걷기를 통하여 몸의 세계를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계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어느 새 우리 몸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걷기는 우리 자신을 인간 본연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은 ‘걷기’에 ‘느림의 미학’을 더한 브르통교수의 신작입니다. 걷기에 느림을 업그레이드하게 된 것은 걷기는 단순히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도 동원되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게 된데 있다고 합니다. 걷기는 시간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우아하게 잃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62쪽)”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느림은 옛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새로운 트렌드이기도 합니다. 모 통신사의 ‘빠름빠름빠름’이라는 광고카피가 빠름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추세를 잘 나타낸다고 한다면, ‘느림’은 빠름을 추구하는 트렌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하겠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설파한 피에르 쌍소는 일찍이 “(느림)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2쪽, 동문선, 2000년) 그리고 ‘길은 느리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작은 일에도 감탄할 줄 아는 지혜를 준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시 걷기가 느림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라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에 쫓기던 제가 걷기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동기는 대책 없이 불어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시작한 산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운동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그저 빠르게 걸었습니다. 체중이 적절한 수준으로 줄어든 다음에도 체중을 유지하기 위하여 산책을 이어갔고, 산책은 주말을 이용한 근교의 하이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 일간지의 주말섹션에 소개되는 걷기에 좋은 길을 따라 걷다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에 소개된 52개의 코스를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걷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걷기예찬> 10년 후에 저자는 “오솔길이나 도로 지나기, 숲이나 산을 활보하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쁨을 만끽하기, 이 모든 걷기는 오로지 자신의 신체 수단 하나에만 몸을 맡긴 채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이다.(9쪽)”라고 다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 유용성, 수익,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걷기는 느림, 유연성, 대화, 침묵, 호기심, 우정, 무용성을 우선시하는 저항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길은 대학과도 같다. 단순히 지식을 나눠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을 다듬고 늘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 길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돌아보기에 알맞은 존재의 철학까지 전파하기 때문이다.(11쪽)”

자, 그럼 느림으로 업그레이드된 브르통의 ‘신(新) 걷기예찬’을 살펴볼까요?  저자는 걷기야 말로 인간의 본질로 회귀하는 길이라고 설파합니다. “천천히 길을 걷노라면 세계 내의 존재가 관능의 극치에 도달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받을 줄 아는 자에게는 은총이 넘쳐나는 세상의 낯익은 구성 속 작은 돌파구, 평행한 세계에서 감춰진 비밀의 천 사이로 보이는 장면들과도 같은 순간들이다.(114쪽)” 제가 주말에 다녀온 곳들 가운데 유독 기억나는 곳은 오산에 있는 마등산 솔숲으로 난 길입니다. 빽빽하지 않은 소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에는 솔가루가 수북하게 떨어져 있고, 솔향이 진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걷는 것에 더하여 볼거리와 냄새까지 더해진 것이 기억을 강하게 한 것 같습니다. 아! 산비둘기가 우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카프리의 정원을 걷다가 공간을 찢는 듯한 새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울음소리가 한순간에 세상을 내면의 공감으로 바꿀 수 있더군. 우리는 새가 제 스스로의 가슴과 세상의 가슴을 구분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으니까.(126쪽)”

탈 것으로 이동할 때보다 걷을 때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예리해집니다. 그리고 느리게 걸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인하여 오감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자연에 들면 오감을 뒤흔드는 소음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자극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상은 아낌없이 선물을 주고 여행자 또한 탐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 준다.(67쪽)”

때로는 길이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장소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쥘리안 그라프가 프랑스 중부 트롱세 지역의 숲길을 걸었을 때의 경험을 인용합니다. 달도 없는 발 깊은 숲을 가로지르다 보니, 숲은 질서와 무질서가, 어둠과 빛이, 생기와 무기력이, 믿음과 두려움이 결합되어 뒤섞인 세계였던 것입니다. 시각은 거의 먼 곳을 보지 못하고 귀를 쫑긋하고 세워 청각을 극도로 긴장시켜도 세상의 분명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내장산 숲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으로 안내할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길은 때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곳으로 안내한다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는 이유입니다.

그라프가 한밤중의 숲에서 경험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느낌에 대하여 저자는 ‘밤은 어떤 이들에게는 감사와 안도감 그리고 내향성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 채 공포와 위협을 구현하기고 한다.(71쪽)’라고 밤의 양면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인 편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삼군사관학교에서 16기로 군의후보생 훈련을 받을 때, 처음으로 100km행군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녁을 일찍 지어먹고 학교를 떠나 이튿날 해질 무렵에 복귀하는 훈련입니다. 학교를 출발해서 어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대오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정 무렵이 되면서 대오가 흩어지면서 앞에 가는 대원도, 뒤에 따라오는 대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동행하는 대원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밤길을 가다보면 곁에 가는 대원이 정말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별이 총총한 밤에 대한 낭만주의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권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존 뮤어가 요세미티 계곡에서 보낸 밤처럼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둡고 거대한 두 암벽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 띠에서 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내가 그곳에 누워 그날 하루의 교훈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사이에 갑자기 보름달이 염려의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내밀어 협곡을 굽어보는 듯해서 깜짝 놀랐다. 마치 홀로 있는 내가 걱정스러워 살펴보기 위해 방 안에 들어온 사람처럼 하늘의 제자리를 벗어나왔다고 말하는 듯했다.(75쪽)” 그래서일까요? 밤에 걷는 일은 시간을 기막히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세계, 어슴푸레한 달빛은 태초 이래로 거의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밤길이 더 낭만적이었을까요?

<희망의 발견>의 저자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은 “장거리 보행자에게 글이란 가장 강렬한 진정의 순간이다(…). 저녁마다 글을 쓰면서 여행자는 또 다른 표면으로 길을 계속 이어가고 페이지 위에서 전진을 연장한다.(89쪽)”라고 했답니다. 걸으면서 경험하는 찰나의 느낌마저도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정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 혹은 꼼꼼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억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망각의 영향으로 여정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걸을 때 느낀 감동을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뒷날 읽어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으며, 이렇게 붙들어온 느낌을 다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록은 또한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그와 같은 여정을 뒤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제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을 따라간 것처럼 말입니다.

서울성곽을 따라 남산의 북쪽 산책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남긴 글에 “도심에 4km 가까운 산책길을 만날 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될까 싶다”라고 적었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특색 있는 산책길이 산재해있습니다.(김영록, 박미경 지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서울, 수도권) 도시를 걷는 일에 대하여 저자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도시에서 걷는 일은 군중, 익명성과 마주치는 일이다.’라고 한 저자는 “도시의 보행자는 지나면서 서로의 삶의 사건들을 간파하고, 존재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고 도시를 자신이 일등석을 차지한 극장으로 바꾸어놓는다.(179쪽)”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걸으면서 만나는 타인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 아닐까요?

피에르 쌍소는 시골길을 걸을 때만큼이나 우리의 후각을 설레게 해주는,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은밀한 길들을 도시에서도 일찌감치 발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도시 역시 우리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냄새를 풍기고, 감촉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들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도시의 존재 사이에 교감이 일어남을 느낀다는 것이며, 도시에서 특유의 고유한 음색과 분위기를 느끼려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도시에게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97-112쪽, 동문선) 역사가 오래된 서울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초현대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북촌처럼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천천히 걷지 않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걷기는 용어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의미에서 땅에 발을 딛는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똑바로 서는 일이다(220쪽)’라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모든 길은 우선은 자신의 내면에 묻혀 있다가 발길 아래 기울고, 특정한 목적지로 이끌기 전에 자신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때로는 마침내 자아의 행복한 변화에 도달하는 좁은 문을 열어준다.(230쪽)”라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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