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수석부회장)

[라포르시안] 의료기기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국민 안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공공재’로 볼 수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최대 구매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국민의 공적 부조를 통해 건강보험 재원을 충당하고 있지만 의료기기업체 입장에서는 이익 추구를 위한 시장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와 특성 때문에 보건의료 정책이 마케팅의 중요한 면을 차지하는 반면 사적 이윤 추구를 위한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어 행정 제재의 강도도 센 편이다.

의료기기산업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역 관련 의료기기 수급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일부 제조사의 품질 불량이나 유통업체들의 매점매석 그리고 판매업자들의 폭리를 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사 제품의 부작용에 대한 보상을 기피하거나 불량을 숨기는가 하면 허가와 다른 저가의 산업용 부자재를 사용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잘못도 저질렀다.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의료기기산업계를 대표하는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수석부회장으로서 국민들께 미안한 마음이 매우 컸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잘못된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해 민관이 참여하는 정책기구를 통해 다양한 의견 개진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의료기기산업계를 대표하는 단체로는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한국의료기기협동조합 ▲한국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 ▲한국의료기기유통협회 ▲한국체외진단의료기기협회가 있다. 이밖에 의료기기 관련 단체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 단체는 해당 분야 회원사를 대표하는 이익집단으로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한편 공익을 위한 나름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가령 공정경쟁규약을 통해 투명한 의료기기 유통구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의료기기광고 자율심의제도로 허위·과대 광고를 심의해 소비자를 보호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이기는 하지만 세관에 직원을 파견해 불법 의료기기가 수입되지 못하도록 심사하는 문지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기존의 의료기기 유통과 품질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과거 100년보다 앞으로 10년의 기술 발전은 더욱 빠르게 이뤄질 것이며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질환 역시 급성기에서 만성기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AI)과 유전자 기술 발달로 기존 의료기기와 공산품 그리고 약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유무형의 융·복합 기술이 접목된 신의료기기 개발도 시장에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의사와 환자 간 정보 비대칭 간격은 줄어들고 있고 ICT(정보통신기술)를 기반으로 어디서나 의료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본인의 질병과 치료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 지성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의료기기산업 역시 이러한 변화에 부응해 향후 거시적인 정책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보건의료의 대원칙인 ‘공공성’에 기초한 몇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산업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제도 전반에 관한 정책 방향을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가 필요하다. 제품 개발을 위한 임상 정보나 환자의 개인 정보는 관련 단체가 노력해 바꿀 수 있는 성격의 정책이 아니다. 이는 매우 고차원적인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합의가 수반 돼야 하는 만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둘째 의료기기산업 관련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공동의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이미 산업별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전문적인 연구 결과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앞으로의 의료기기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의료기기가 속속 출시되고 있지만 효능이 아닌 부작용에 대한 논의 역시 산업계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공공성의 영역이고 이에 대한 답은 전문적 역량을 갖춘 조직이나 기관을 통해 정부가 아닌 산업계가 제시해야 한다.

셋째 미래 변화에 따라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보건의료 정책에 산업계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며 이를 위한 공동의 조직이 필요하다. 정부 정책 입안부터 각 정당의 보건의료 정책 입안 때 지금까지 산업계 역할은 개별적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정책과 시범사업 등에서 시차와 기술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의료기기산업계도 보건의료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공동의 논의기구 구성을 논의해야 한다.

의료기기산업은 미래 유망업종이자 중요한 먹거리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료기기산업계 각 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수 있는 공동의 논의기구를 구성해 실효성 있는 정책 제안 역량을 키우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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