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수(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 산업이사)

[라포르시안] 의료기기 분야에서 국제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국가 간 규제를 통일해 상호 인증 원칙에 따라 가입국 어느 한 나라에서 인정받은 허가를 다른 나라에서도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의미다. 수준 및 단계별로 살펴보면 기준 규격에 대한 인정 범위를 정해 심사에 반영하는 단계에서 특정 국가의 인허가를 그대로 인정하는 적극적인 조화 그리고 특정국의 허가를 인정하되 상호 인정이 아닌 일방향의 방식도 존재한다.

공신력 있는 국제 기준이나 특정 시험기관 등을 선별해 요건에 해당하는 검사 성적서를 인정하는 제도는 규제 과학 측면에서 기술적 국제조화를 통해 안전성을 확보하는 자료를 인허가 과정에서 인정하는 방법이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의료기기 단일심사 프로그램(Medical Device Single Audit Program·MDSAP)과 같이 한 나라에서 인정한 기준을 상호 인증에 따라 다른 나라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인허가에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 더 넓게 본다면 유럽 CE와 같이 어느 나라에서 인증을 받던 유럽 국가 내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밖에 한방향 형식으로 최근 싱가포르의 예처럼 인허가를 말레이시아나 태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협약이 맺어졌다. 이는 인허가를 위한 기술력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정부 차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아세안 국가 간 오랜 노력의 결과가 일부 이뤄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본적으로 상호 인정을 택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자국 인허가를 받을 경우 한국 정부가 받으려면 상대국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현실에서 나라마다 규제 정도에 대한 차이가 있다 보니 의료기기에서 거의 실현된 예가 없고 현재 가장 접근한 제도가 GMP에 대한 상호 인증을 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IMDRF)을 통해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국제조화의 마지막 종결점은 어디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 CE와 같이 공통의 인증 제도를 통해 완전 조화를 이룰 경우를 가정하자. 규제란 결국 돈과 시간이다. 규제 강도를 높일수록 정부와 업계 모두 비용은 증가한다. 산업계 입장에서 인허가 강도가 높아지고 비용이 적게 들기 위해 단 한 번의 인허가로 가능하면 많은 나라에서 인정받고 수출을 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설명으로만 본다면 가장 경제적인 제도이다. 세계시장의 양대 산맥인 미국 FDA와 유럽 CE를 비교하면 당연히 시장 규모 측면에서 CE의 영향력이 더 크다. 유럽 전체와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위 가성비 차원에서도 가장 좋은 제도다. 하지만 국민 안전을 생각한다면 FDA 인허가를 한 방향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독립적인 기관으로 단일 규모 최대의 규제 전문가와 인프라를 갖춘 공신력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안전성 측면에서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결국 규제 조화의 마지막 종결점은 우리의 규제를 국제 수준으로 맞추고 세계 어디에나 추가적인 인허가 노력 없이 수출할 수 있는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가 국제조화를 통해 수출을 할 수 있는 제품은 매우 제한돼있다. 오히려 선진국 제품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돼 빠른 시장 잠식으로 국내 제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규모의 경제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최대의 위협이다. 지금도 다국적기업과의 싸움에서 힘이 드는데 국제조화를 통한 규제 일원화 역시 우리에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당장은 시간이 필요하고 제조업에 대한 충분한 경쟁력 확보가 우선이다. 충분치 않은 내수 시장이지만 국내 제조업의 기반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산업으로서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의료기기제조업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지만 직접적인 현금성 지원과 같은 규제 정책 또한 생존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의료기기산업에 대한 기대가 현실이 되기 위해 우리는 국제조화의 종착점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하고 제조를 위한 맞춤형 규제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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