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린저 평전 / 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 / 김현우 옮김 / 민음사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얼마 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추천되는 필독서로 꼽히는 책입니다. 1951년 출간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았던 책이 꾸준하게 주목을 받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나온 책에는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만 적혀있을 뿐이며, 띠지에 젊은 시절의 작가의 사진이 곁들여져 있고, ‘1951년 출간된 후 전 세계 젊은이들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는 문제작’이라는 카피가 눈에 띌 뿐 뒷표지에 나열되는 추천의 글이나 옮긴이의 해설, 심지어는 작가의 연보마저도 생략되어 있는, 읽는 이를 위한 서비스정신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불친절한 편집입니다. 아무리 문학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전적으로 읽는 이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된다고 해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안내는 필요한 것 아닐까요?

위키백과사전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리스마스 휴가 바로 전에 펜시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의 72시간, 3일의 생활을 다룬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쫓겨났고 부모님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홀든은 학교를 일찍 떠나고 뉴욕 시에서 홀로 며칠을 보내기로 하지만, 뉴욕에서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한 채 서서히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다. 끝에서 독자는 홀든이 자신의 심리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텍스트의 서두부분에서 “이건 전부 형인 D. B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이다. 형은 할리우드에서 살고 있다. 그곳은 이 지저분한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고, 형은 주말마다 나를 만나러 오곤 했다.(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호밀밭의 파수꾼, 10쪽, 민음사, 2001년판)”라고 하였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병원에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많은 것을 묻고 있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홀든은 지난해부터 형이 살고 있는 할리우드 부근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아왔음을 유추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정신과를 전공하지 않아서 놓쳤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2박 3일 동안 홀든의 행적에서 정신과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퇴학사실이 집으로 알려지게 되면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을 것으로 두려워하는 점이라거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퇴학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등 때문에 홀든이 정신과치료를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반 질병으로 치료받은 사실도 개인의 이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물며 정신과진료 이력은 피하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원에 1년 이상 입원치료를 받게 된 배경이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점이 저에게는 숙제로 남을 것 같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남았던 많은 의문은 결국 <샐린저 평전>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1919년 1월 1일 뉴욕에서 태어난 샐린저는 2010년 1월 27일 오랫동안 은거하던 뉴햄프셔주 코니시에서 타계했습니다. 92세에 이르도록 장수하였음에도 1948년부터 1959년 사이에 발표된 1편의 장편소설과 13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그는 1965년 이후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세인의 눈을 피해 코니시에 은거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자신의 삶이나 작품에 대한 관심을 극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작가 케니스 슬라웬스키가 쓴 서문 중 일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린저 평전>의 저자 케니스 슬라웬스키는 샐린저가 타계하기 이전부터 그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해왔다고 합니다. 샐린저가 데뷔할 무렵에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책이 정보의 흐름을 주도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세인의 관심을 벗어나기 위한 샐린저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통할 수 있었겠지만, 인터넷의 발달은 이런 노력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슬라웬스키가 샐린저에 관한 웹사이트를 7년 동안 유지하고, 그 노력의 결실로 <샐린저 평전>을 낼 수 있게 된 것도 인터넷의 확산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샐린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샐린저의 학창생활은 홀든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와중에서도 샐린저 가족은 부를 쌓아 사회적 지위를 높여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제롬은 웨스트사이드의 공립학교에서 YMCA가 운영하는 맥버니학교로 전학하였고, 여기에서 연극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펜싱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고 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지하철에서 펜싱장비를 잃어버리는 일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은 퇴학처분을 받게 되면서 벨리 포지라는 사관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이 곳은 홀든이 다니는 기숙학교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홀든과는 달리 제롬은 벨리 포지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어시너스 대학교를 거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특히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스토리>의 편집자인 휘트 버넷이 가르치는 단편소설 작법 수업과 시인이지 극작가였던 찰스 핸슨 타운의 시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버넷은 샐린저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였고, 샐린저는 휘트 버넷을 정신적 지주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버넷이 샐린저의 재능을 키워가는 과정도 주목할 만합니다. “휘트 버넷은 샐린저를 응석받이로 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월요일 수업 때 매번 뒷줄에 앉아 있던 청년에게서 문학적 천재성을 발견하고, 곧장 명성을 안겨 준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버넷은 샐린저 스스로 성공을 찾아가도록 안내했다. 정신적 지주로서 버넷은 자기 제자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자기 제자가 먼저 다른 방법들을 모두 시도해 보기를 바라고 있었다.(53쪽)” 멘토가 멘티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모범을 보는 것 같습니다. 버넷의 뒷받침으로 샐린저는 1940년 1월 잡지 <스토리>에 ‘젊은 친구들“이라는 단편이 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9월에는 남성잡지 <에스콰이어>에 ’부서진 이야기의 핵심‘이 실렸고, 10월에는 그가 목표로 삼았던 <뉴요커>에 ’매디슨에서 시작한 작은 반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작품은 홀든 모리시 콜필드라는 뉴욕출신의 불만 가득한 청소년이 등장하는 자전적 작품이라고 하였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이 무렵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면서, 샐린저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 무렵만 해도 자신의 작품이 잡지에 실릴 수 있도록 다양한 궁리를 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작품을 할리우드에 팔아볼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 관심을 두고 있던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의 관심을 끌어서 좀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무렵 샐린저는 어느 정도 상업주의에 경도되고 있었는데, 군복무와 글쓰기를 병행하기에 가벼운 작품을 쓰는 것이 더 쉽고 고료도 좋았다는 것입니다. 1944년 1월 29일 조시워싱턴호를 타고 영국의 리버풀에 도착한 미군부대에는 샐린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샐린저의 독일어와 프랑스어 구사능력은 그를 방첩부대에 배속하게 하였고, 전투 중 첩보활동, 사병대상 안보교육, 점령지 수색, 적군 및 민간인 탐문 등의 활동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치열해지다 보면 전장 한 가운데 서있게 되고,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참전경험은 그를 변하게 했는데, 어렸을 때보다 더 거칠어졌고, 덜 섬세해졌다고 합니다.

전투의 사이사이에 작품쓰기를 계속했는데, 그 배경에는 대학시절부터 그의 글을 보아온 휘트 버넷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단편만 쓰고 있는 샐린저에게 장편소설을 써보라는 버넷의 격려에 힘입어 샐린저는 조각조각 나누어서 글을 쓰는 방법을 택하여 길이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체를 엮으면 하나의 장편이 될 수 있는 단편을 쓰는 방식입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많은 참전용사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는데, 샐린저는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모든 참전 용사들을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했습니다. 특히 1950년 4월 <뉴요커>에 실린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과 누추함을 담아’라는 작품은, 2차 세계대전 후 참전 용사들이 겪고 있던 트라우마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참전 당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이 고통스럽게 견뎌낸 일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랑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전쟁 경험이 던진 질문들, 삶과 죽음의 문제, 신의 문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작가는 그 깨달음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문장, “누구에게든, 무슨 이야기든 하지 말기를. 그러면 모든 이들이 그리워지지 시작할 테니까”에 녹아 있다고 했습니다.

잡지 <뉴요커>는 샐린저의 글에서 문장의 정확함, 특히 자연스럽게 흐르며 소리 내 읽었을 때도 듣기에 좋은 대사를 써내는 능력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만, 샐린저가 써낸 많은 단편들은 <뉴요커>를 비롯한 다른 잡지들에서도 거절되기 일쑤였고, 이렇게 거절된 작품을 손을 보아 다른 잡지사에 보내는 일은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1944년 휘트 버넷의 격려로부터 영감을 얻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1년여의 작업 끝에 1950년 가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르너 풀트가 쓴 <금서의 역사>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1951년 런던에서만 출간될 수 있었고, 미국에 수입된 책이 더 이상 압수당하지 않게 되자 1958SYS에 뉴욕출판사가 미국판 출간을 감행했다고 하였는데, <샐린저 평전>에서는 1951년 7월 16일 미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출간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책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더라도 미국내 도덕주의자들의 잣대는 피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특히 열여섯살 소년이 지나치게 음란한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우연히 만난 창녀에게 동정을 잃었다는 부분이나, 술집을 전전하면서 꽤 많은 술을 마시는 등의 행위는 청소년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아닐 뿐 아니라 금지된 사항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중학교 학생들의 필독도서로 읽도록 권장되고 있는 현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샐린저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홀든은 어른들 뿐 아니라 또래의 젊은이들 역시 속물이라고 경멸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려 할 뿐 아니라 미래에 자신과 같은 위기를 맞게 될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역할, 즉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줄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뉴욕에 도착한 홀든은 자신이 비난하는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가고 있어, 얼핏 보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작품을 통하여 이중적 구조들, 예를 들면 위선과 환상을 상징하는 상류층 기숙학교와 부유한 이스트사이드 아파트와 대비되는 허름한 에드먼드 호텔과 홀든이 하루 밤을 보내는 그랜드센트럴역 대합실, 기숙학교를 떠나면서 찾는 스펜서 선생님 댁의 조촐하고 검소한 집과 동성애적 접근으로 홀든을 놀라게 하는 앤톨리니 선생님의 화려한 아파트 등입니다. 이렇듯 대조적인 상황이 교차되는 것은 아직 성장기에 있는 젊은이가 어디를 택해야 할지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로 자리 잡은 샐린저는 작품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유난히 자신의 견해를 앞세워 편집자를 곤혹스럽게 하곤 했다고 하는데, ‘프래니와 주니’의 표지에 적은 “작가가 글을 쓰는 동안 익명성을 유지하고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에게 두 번째로 소중한 가치일 것 같습니다. 이게 저의 불온한 생각입니다.”라는 글을 보면 샐린저가 뉴햄프셔주의 코니시에 은둔하게 된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샐린저 평전>의 후반부는 어떻게 하면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볼까 애를 쓰는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려는 샐린저의 극단적인 노력을 적고 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여전히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의심의 눈초리로 부모세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홀든이 더 이상 기이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구세대를 가르는 이분법적 접근으로는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는 것이 좋은지를 안내하는 작품은 어디 없나요?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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