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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Book소리] 나를 세우고, 남을 열어 주며, 세상을 밝히는 논어논어 1,2,3 / 심경호 지음 / 민음사 펴냄, 2013년

갑오(甲午)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에게는 육십갑자(六十甲子)가 일주하여 본디의 띠를 다시 맞는 의미가 큰 해이기도 합니다.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천운을 타고 태어나지 않고서야 본디의 띠를 두 번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언제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산 날이 살 날보다 많아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부터 앞날을 내다보는 시간보다는 지나온 날을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예과 때 학보사에 다니는 친구를 둔 덕분에 여름방학에 대한 단상(斷想)을 학보에 싣는 행운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제를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잡아 글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동양철학에 마음이 쏠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한문교육의 틈새를 묘하게 빠져나온 세대인지라 한문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귀동냥으로 배웠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고전은 ‘그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 아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해왔습니다. 언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기회가 되지 않던 터에 심경호 교수의 <논어(論語)>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경호 교수가 “우리는 왜 『논어』를 읽는가?”라는 질문을 내고, “나를 세우고 남을 열어 주며 세상을 밝힌다”라고 답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논어는 학이(學而)편으로 시작하여 모두 20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학이편을 가장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의 생각과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공부는 학생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해야 한다는 평생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익히 알고 있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렇습니다. 배운다는 것을 스트레스로 생각하지 말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일러두기를 챙겨 읽어봅니다. 심경호 교수는 <논어> 20편 498장 가운데 현대에도 특별히 의미가 있는 장을 선별하여 3권에 나누어 담았다고 합니다. 1권은 ‘옛글을 읽으며 새로이 태어난다’라는 부제로 <논어>의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理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편)을 수록하였고, 2권에는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로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편을 수록하였으며, 3권에는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라는 부제로,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편을 수록하였습니다. 각 글은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원문 및 주석’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역 및 주석과 해설은 주희의 신주(新注), 즉 <논어집주>와 한나라․당나라 때 이루어진 주소(注疏), 즉 <논어주소> 그리고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와 현대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하였다고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학이(學而)편의 한 구절처럼 살아오면서 흔히 듣고 뜻을 익히고 있는 구절을 만나면 반갑다는 느낌이 들어 쉽게 넘어갑니다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는 구절들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뜻을 새기다보면 책읽는 호흡이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연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면, 2008년에 제2차 광우병파동을 겪으면서 일부 전문가들이 보여준 이상한 행태와 연관시켜 이해한 앎에 관한 구절들입니다. 먼저 위정편의 17장입니다. “由(유)아 誨女知之乎(회여지지호)인저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오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이 是知也(시지야)니라”라고 적고, “유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 주겠노라.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1권, 80쪽)”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술이편의 27장입니다. “多聞(다문)하여 擇其善者而從之(택기선자이종지)하며 多見而識之(다견이지지)가 知之次也(지지차야)니라”인데, “많이 듣고서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면 완전한 지식의 버금은 될 것이다.(1권, 254쪽)”라고 해석합니다. 전자에 대하여 저자는 주희의 풀이를 인용하였습니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비록 앎이 완전하지는 않다 해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폐단은 없을 것이므로 앎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모르는 것에 대한 자각으로 앎을 추구한다면 앞으로 알아 나갈 방도가 생길 것이다.(1권, 80쪽)” 후자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조선 인조 때 장유(張維)는 당시의 옹졸한 지식인들이 자기 소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체를 거짓으로 여기며 무시한다고 비판했다.”고 소개하면서 “다문다견을 통해 학문의 고착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두 개의 구절을 연관지어보면, 다양한 주장들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아예 검토대상에서 빼버린다면 그 앎은 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제2권에는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편을 다루었습니다. ‘사랑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부제의 의미는 공자님께서 제자들과 주고받은 말씀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한(子罕)편 제7장을 보면, “有鄙夫(유비부)가 問於我(문어아)하되 空孔如也(공공여야)라도 我叩其兩端而竭焉(아고기양단이갈언)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내게 물어오면 그가 아무리 무지할지라도 나는 시종과 본말을 다 말해준다.(28쪽)’라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물어오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야 오죽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스승의 표상으로 받들만하다고 하겠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누구나의 꿈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던 공자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자기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가 많이 다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도 잘 어울리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의 우리나라의 사회현상과 비교해서 읽는 예로, 안연(顔淵) 제11장을 들 수 있습니다. “齊景公(제경공)이 問政於孔子(문정어공자)한대 孔子對曰(공자대왈) 君君臣臣夫夫子子(군군, 신신, 부부, 자자니)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묻자, 공자께서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2권, 140쪽)”라고 풀어 쓰신 것처럼 각자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설화를 자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안연(顔淵)편의 제21장을 꼭 새겨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一朝之忿(일조지분)으로 忘其身(망기신)하여 以及其親(이급기친)이 非惑與(비혹여)”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재앙이 부모에게까지 미친다면 미혹이 아니겠는가?(2권, 162쪽)”라고 해(解)하고 있습니다. 한때의 분노가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떠나서,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분명 재앙일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 듯합니다.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논어>의 3권에는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라는 부제는 격동기를 살아내는 군자로서 지켜야할 덕목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군자라고 하면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고답적이고 고루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만, 세상사는 이치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면 품격 있는 신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위령공(衛靈公)편의 제18장을 보면, “君子(군자)는 病無能焉(병무능언)이오 不病人之不己知也(불병인지불기지야)니라”라고 했습니다. 해(解)를 보면,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기 않는다.(3권, 58쪽)”라고 했고, 역시 위령공(衛靈公)편의 제20장을 보면, “君子(군자)는 求諸己(구제기)오 小人(소인)은 求諸人(구제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3권, 62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제22장에 나오는 “君子(군자)는 不以言擧人(불이언거인)하며 不以人廢言(불이인폐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사람이 나쁘다고 해서 그의 좋은 말을 버리지 않는다.(3권, 66쪽)”라는 대목은 요즈음 신사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위정자 혹은 지도자를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양화(陽貨)편의 제6장에서 “恭則不侮(공즉불모)하고 寬則得衆(관즉득중)하고 信則人任焉(신즉인임언)하고 敏則有功(민즉유공)하고 惠則足以使人(혜즉족이사인)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공손하면 모욕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실하면 남이 나를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적을 세우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160쪽)”라고 해설하셨습니다. 따로 토를 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는 자한(子罕) 12장의 한 구절처럼 “나는 제값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2권, 37쪽)”라고 하신 대목이나, 양화(陽貨)편 제5장에서 “子曰(자)왈 夫召我者(부소아자)는 而豈徒哉(이기도재)리오 如有用我者(여유용아자)인댄 吾其爲東周乎(오기위동주호)인저”라고 해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공연히 하는 일이겠느냐?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158쪽)”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가슴에 품은 포부는 큰데 불러서 써주는 곳을 찾지 못해 답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꽤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예를 바탕으로 하고 실무를 중시하는 조직관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마침 양화(陽貨)편의 제4장의 대목이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子之武城(자지무성)하사 聞弦歌之聲(문현가지성)하시다 夫子莞爾而笑曰(부자완이이소왈) 割鷄(할계)에 焉用牛刀(언용우도)리오”라는 대목으로, “공자께서 무성에 가시어 현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3권, 154쪽)”라는 대목입니다. 공자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유가 맡아 다스리는 무성에 갔는데, 큰 정치의 도구라고 할 예악으로 작은 고을 무성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농담을 하신 것입니다. 조직을 다스리는 원리는 조직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악은 어느 조직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 <논어>의 본래 맥락을 음미할 수도 있고, 내키는 대로 책을 펼쳐 해당 강의의 주제를 자신의 처지와 연관 지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 책은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 바쁜 현대의 삶속에서 이 책은 일종의 멘토가 되어 고전의 가르침을 일상적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단 차례로 읽어 전체를 개관하고, 일상에 잘 부합하는 대목을 다시 새겨보는 방식으로 가보려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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