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병원 등 몸집부풀리기 경쟁의 희생양…"교육은 사라지고 과잉근로만 남아"

최근 C대학병원 마취과 전공의(R3) A씨의 사망 사건이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본지에 제보한 A씨의 대학 선배의 증언에 따르면 A씨는 파견수련을 나간 병원에서 모욕적인 말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 사망 전날에도 모병원에서 타과 스텝에게 태도가 불량하다는 말을 듣고 다툰 후 마취과 스텝에게 면담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본지는 3개월 전 B의료원(자병원)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레지던트 1년차 K씨를 취재한 바 있다. 당시 K씨는 파견수련을 나간지 2주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단 한 차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의료봉사를 나갈 때 전공의들에게 파견 전공의라는 신분을 감춰달라고 부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K씨는 “전공의 수련평가는 100% 전공의 설문조사에 의해 이뤄진다”며 “한달에 한번씩 병원 측에 대해 실명으로 하는 설문조사에 어느 누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토로했다.

근 20년 이상을 이어온 수련병원 간 전공의(인턴 포함) 파견교육 시스템이 심각한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전공의 파견수련은  모병원과 자병원(산하 부속병원 포함) 간 파견과 모자협약을 체결하지 않은 수련병원 간 파견의 두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현재 모병원은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35곳, 자병원은 100여곳에 달한다. 1990년까지 21개 모병원-46개 자병원에 불과했지만 지속적으로 그 수가 증가해왔다.

특히 '빅5' 병원의 자병원 수는 가톨릭중앙의료원 8곳, 세브란스병원 10곳, 서울대병원 9곳, 삼성서울병원 6, 서울아산병원 3곳 등 총 36곳으로 상당수에 달했다.     모자협약을 체결하지 않은 수련병원 간 전공의 파견수련도 급증하는 추세다. 1995년 278명에 불과했던 파견수련 인원이 2005년 582명, 2011년 1,830명으로 늘었다. 이는 최근 6년만에 3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로, 작년 전공의 정원(3,982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규모다. 그동안 수련병원 지정 숫자도 늘어 1995년 212곳에서 2011년 275곳으로 30% 가까이 증가했다.

이들 수련병원 간 전공의 파견 인원의 증가는 국내 대형병원들이 적극적인 병상 확충을 통해 몸집 부풀리기에 나선 시기와 맞물린다. 

실제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병상 수는 1995년 13만1,000병상에서 2005년 27만9,000병상, 2009년 41만4,000병상으로 급증했다.

전공의 정원도 1995년 3,477명에서 1997년 4,399명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2011년 4,063명을 기록해 2000년대 이후 3,000명 후반대를 오르락내리락했다.

병상 수 확충에 따라 대형병원들이 전공의 모집 정원을 늘려야 했고, 지방의 종합병원들은 전공의 인력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모자병원 등을 활용한 파견 수련이 급속도로 확대된 이유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육수련부장을 맡고 있는 교수는 “모자 협약으로 인해 모병원은 자기 병원 소속 전공의를 2~3배 이상 뽑을 수 있게 됐다. 결국 병원을 거쳐간 전공의들은 동문이 되고, 그들이 환자 전원 체제를 갖춰 모병원의 외연이 확장되는 현실”이라며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자병원은 전문의 보다는 저렴한 의료인력으로 전공의를 충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병원, 수련교육은 뒷전인 채 값싼 의료인력으로만 치부하지만 자병원이 전공의 확보에만 주력하고 교육은 뒷전인 상황이 지속되면서 전공의 교육의 질과 근무환경은 급격히 악화됐다.

대한전공의협의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공의 10명 중 5명은 일주일에 100시간을 근무하고, 내과 2년차 전공의(2009년 기준)는 1년 급여로 약 3,680만원을 받는다.

또 수련병원들이 해마다 받는 병원신임평가 시 전공의가 수련기간 중 배우는 술기 평가항목은 미약하거나 애매모호하게 반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전협 관계자는 “수련병원들이 미흡한 술기 평가항목 마저 지키지 않아도 다른 항목이 충족되면 수련기관 인정유지에 문제가 없는 기이한 평가제도”라고 꼬집었다.

가톨릭의대 김성훈 교수(수련교육부장)는 “자병원은 전공의 교육을 시킨다보기는 (인력 공백을) 땜질하고 간다는 식의 경향이 강하다. 이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모자병원이 머리를 맞대고 수련프로그램을 잘 짜고 실행하면 되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형병원들의 부속병원이 증가하면서 자병원의 불만도 높다. 

작년까지 대형병원의 자병원이었던 경남의 한 종합병원은 올해 수련병원 신청을 포기했다.

병원 관계자는 “도저히 수련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울뿐더러 모병원이 전공의 배정에 있어 부속병원을 먼저 챙기지 자병원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며 “전공의 1~2명 받고 의료기관인증평가나 수련평가 때 평가항목이 추가돼 재정적, 행정적 부담만 더 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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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수련병원 정리하고 전공의 총정원제 도입해야"전공의 파견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교육여건이 부실한 수련병원을 정리하고, 전공의 총정원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김성훈 교수는 “수련병원의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원래는 병원신임평가센터가 그 역할을 해야 했지만 모두 회원병원이다보니 쉽지 않았다. (수련병원을 정리하지 않으면) 수련병원끼리 공멸하는 구조로 갈 것”이라며 “하지만 지난번 남광병원 수련병원 박탈 건도 절차가 복잡했는데 쉽게 병원들을 정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현 모자병원과 독자병원의 중간 영역으로 전공의 총정원제 도입이 절실하다”며 “전공의 총정원제는 A라는 대표병원과 B, C, D 등의 병원이 상호 파견 협약을 맺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모든 병원들이 수련프로그램에 공동 참여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공의 총정원제는 가톨릭중앙의료원과 자병원 8곳을 대상으로 2003년부터 시범사업을 진행해왔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8월 전공의 총정원제 시범사업을 평가하는 공청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8월 공청회에서 전공의 총정원제의 제도 도입을 위해 문제점들을 검토할 것”이라며 “현 모자병원 등의 부작용을 해소할 대안 중 하나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전협과 의사협회는 수련병원의 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 병원신임평가센터를 대신할 새 기구 설립을 추진할 방침이다.

대전협은 지난 24일 임시총회를 열고 전공의수련교육평가위원회(K-ACGME) 조직 구성에 대해 논의했다.

K-ACGME는 대한의사협회 주도로 대한의학회, 복지부, 대전협에서 참여하는 협의체로서 전공의 신임평가업무를 병협에서 이관 받아 공정한 병원수련평가를 통하여 전공의들이 양질의 교육환경에서 수련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협의체이다.

대전협 관계자는 “수련환경은 무시한 채 병원의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하는 병원들의 행태를 개선하고 서류상으로 병원정보를 파악하는 현재 신임평가기관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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