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민생 없는 민생론을 비판한다

[라포르시안] 지난주 열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했다. 정쟁에 매몰된 채 민생을 돌보지 않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때 민생이란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나 생계, 즉 주로 먹고 사는 일을 지칭하는 단어로, 오늘날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절대적 가치와 위상을 지닌다. 여당 지도부 회의실의 정중앙 벽면에 “민생을 살리겠습니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민생외면의 대가는 선거 패배로 이어지기 마련. 여야 정치인 모두 예외 없이 민생론자임을 표명한다. 늘 그렇듯 내년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표심을 잡기 위한 ‘민생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권에서의 민생론 활황과 실제 살림살이의 개선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봉건적 통치를 연상시키는 민생구제 등의 표현이 그다지 마뜩지 않지만, 사람들의 안정적 생계 보장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과제다. 특히 최근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경기 침체 등의 여파로 소상공인과 영세 자영업자, 주머니가 얇은 시민들의 생활고가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민생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민생론이 살림살이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진정성’ 결여를 지적할 수 있겠다. “오직 민생”을 외치지만 실제 민생에는 별로 ‘영혼’이 없는 것이다. 주요 종합일간지 사설에 드러난 민생 담론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보면, 자기 진영을 민생의 대변자로 앞세우면서 상대 정치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정략적 기제로 주로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즉, 민생론이 무성하면서도 무력한 까닭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공학적 프레임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정작 민생 문제는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사실상 “민생 없는 민생론”인 셈이다. 민생론의 모순과 허구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민들의 주체적 참여와 민주적 공공성의 강화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민생론이 지금 시대의 과제인 불평등 문제 해결에 천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내포된 주요 한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주류 민생 담론에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고려가 없거나 약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계급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소위 ‘민생 정책’으로 불리는 정책들 가운데 모두가 환영할 수 있는 정책이란 게 과연 얼마나 될까. 한정된 자원의 배분 과정에서 이해집단 간 첨예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는 특정 집단을 위한 민생 정책이 다른 집단에게 직간접적으로 불이익을 줄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누구의 관점과 입장에서 민생을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민생 정책은 당연히 사회경제적 약자와 권력이 취약한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까지 그 대상에 포함하는 건 불필요할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한데 민생론은 이 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 결과, 최근 발표된 자녀 결혼 시 증여세 공제 확대와 같이 상위계급에 유리한 부자 감세 정책마저 민생 정책으로 포장된다. 이는 세수 감소와 긴축 재정으로, 그리고 하위계급을 위한 복지 정책의 축소로 어떻게든 이어지게 될 것이며, 결국 이들의 민생을 더욱 고달프게 만들지 않겠는가.

두 번째, 민생론에는 이념에 대한 고려가 없다. 민생론자들은 ‘이념(정쟁) 대 민생’이라는 대립 구도를 내세우며 이념 논쟁을 배척한다. 하지만 민생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는 것 역시 일종의 이념이다. 민생주의는 민생이라는 개념적 모호성 뒤에 숨은 채 현실의 지배 이념을 충실히 반영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가 경제우선주의다. 거의 모든 민생 대책은 그것을 구상하고 실행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회복을 명분으로, 낙수효과라는 신화에 기대어, 진보적 의제를 후순위로 밀어낸다. 민생의 전제가 되는 경제성장과 무관하거나 이를 저해하는 정책들에는 ‘반민생'이라는 불온의 딱지가 붙여진다.

이밖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에 큰 고통을 안겨주는 가부장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인종주의 등 각종 차별적 지배이념에 대한 고려와 접근도 민생 정책의 목록에 포함되기 어렵다. 보수 종교계와 재계에서 각각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고 있는 차별금지법과 노란봉투법이 민생 법안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 민생론에는 구조(체제)가 없다. 지금의 지배적 민생 담론에는 민생이 왜 파탄나는지에 대한 정치경제적 설명이 결여돼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자본 축적 운동의 지속을 위해 일정한 수의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양산하고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착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하지 않는다. 민생론 어디에서도 지배와 착취, 억압의 구조적 원인과 기제에 대한 논의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민생 문제는 자연화, 개인화되기 일쑤고, 대책 역시 선심성 사업과 고식적 정책들을 반복하는 수준에 그친다. 이는 정치 불신의 심화와 사회적 연대의 약화로 연결된다. 더 큰 문제는 미시적 현상의 차원에 갇힌 민생론이 난무할수록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효과를 고려할 때 민생론은 그 자체로 구조와 체제의 문제를 은폐하는 통치술로 해석될 수 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다시 민생론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이번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진보정당 후보들의 득표율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의 관계가 바뀔 가능성이 전무하다면 거대 양당은 민생론에 영혼을 불어넣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존 민생론이 더는 유효한 득표 전략이 되지 못하게끔 그 실체를 철저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완고한 불평등 체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전략으로서 계급과 이념, 체제를 중심으로 한 대안적 민생론을 구상하고 확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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