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기후정의 관점에서 ‘건강’을 다시 상상하기

[라포르시안] 모로코와 리비아에서 발생한 큰 재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희생자들을 깊이 애도하며, 생존자 구조와 회복에 우리 함께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리비아 홍수 참사의 주된 원인으로 정치혼란과 더불어 기후변화가 꼽히고 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번에도 국가 간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과 피해의 크기가 불일치하는 기후불평등의 단면이 드러났다. 다만 지구 어느 곳도 기후재난의 잠재적 피해 가능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극복은 전 세계 시민들이 당면한 공동 과제다.

때마침 이번 토요일에는 “923기후정의행진”이 예정돼 있다. 지난해 행진을 보더라도, 탄소중립·그린뉴딜과 같은 개량주의적 접근으로는 근본적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면 체제 차원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정치권 일각에서는 여전히 반공주의 타령이지만, 갈수록 심화되는 기후위기는 ‘감히(!)’ 자본주의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체제’가 다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후위기에 있어서 기술낙관론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기후위기 극복은 반드시 탈성장을 필요로 하며, 탈성장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체제 전환’을 자본주의에 관한 의미로 이해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기후위기를 비롯해 돌봄위기와 지역소멸위기 등 우리가 마주한 복합적·총체적 위기의 기저에는 자본주의라는 공통된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위기들 가운데 특히 기후위기는 과학적으로 예측되는 그 파국적 영향력의 규모와 심각성 덕분에 체제 전환론의 현실성을 높이는 데 분명한 장점이 있다. 최근 발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제6차 보고서에도 추상적이지만 체제 전환에 대한 권고가 담겼다. 

물론 체제를 겨냥한 기후정의담론이 일정한 소구력을 갖췄다고 해서 곧바로 체제 전환의 실현가능성이 담보되는 건 아니다. 체제를 보호하는 국가와 자본 권력에 맞서,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연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대항 전략과 운동을 통해 체제를 끊임없이 흔드는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건강·보건의료 분야에서도 그 나름의 전략과 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우리 연구소도 함께 제안했던 ‘모든 이들의 건강을 위한 보건의료·건강권 기후행동 선언’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이 가운데 기후위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 세계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고, 관련 지식의 대중화도 제법 이뤄진 상태다. 다만 기후재난의 피해가 특정 집단과 지역, 국가에 집중되는 기후불평등 문제와 관련하여 그 현상 너머 구조와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는 부족해 보인다. 기후불평등이 건강불평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건강불평등 체제가 기후변화의 부담을 어떻게 전가·외부화하는지 밝히는데 주력함으로써 체제 전환의 필요성을 높일 필요가 있겠다.

한편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모색하는 과제는 상대적으로 더 지지부진한 상태다. 국제 비영리단체 HCWH(Health Care Without Harm)에 따르면, 전 세계 의료 부문은 매년 2Gt(기가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4.4%이자 화력발전소 514개에 해당하는 배출량으로, 국가 단위로 치면 세계 5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셈이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생태친화적 보건의료체계 구축과 관련해서는, 지난 2020년에 영국이 세계 최초로 넷제로(net-zero) 의료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미국에서도 개별 병원 차원에서 의료폐기물의 친환경적 처리, 태양열 전기 생산, 그리고 강력한 온실가스인 흡입마취제(이산화질소, 데스플루레인 등)의 포착기술 도입 등 의료의 탈탄소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에도 친환경병원학회, 녹색병원학회 등이 있지만 활동이 미비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전체 보건의료체계 차원에서 환자 치료와 지속가능성의 균형을 모색하는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다. 지역의료 공백과 수도권 원정 진료 현상은 환자의 고통과 불편 뿐 아니라 반생태적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탄소 배출량 감소를 위해서라도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생태친화적 모델의) 의료기관이 분포할 수 있도록 하는 과감한 제도적 구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위와 같은 접근들 외에도,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떠받치고 있는 문화적 상부구조인 생활양식들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생활양식과 체제는 양의 되먹임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체제변혁에 관한 좋은 이론이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대안 전략은 바로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새로운 건강관을 상상하여 정립하고 이를 확산함으로써 체제의 균열을 키우는 것이다. 

건강은 인간의 고유한 보편적 욕구지만, 건강관은 보편적이지 않다. 건강에 대한 인식과 규범, 가치, 문화는 시대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건강(健康)’이라는 용어 자체도 근대에 들어 일본이 서양의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것이다. 시대와 체제의 경향성에 따라 건강에 대한 지배적 관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본세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건강관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건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자본주의 체제 속 생활양식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지금의 무제한적 건강추구 욕망과 행위로 표출되는 건강지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특징인 ‘과대생산-소비-폐기’ 시스템에 조응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건강은 산업이자 상품이다. 건강과 보건의료가 경제성장(자본축적)의 무한 동력이 될 수 있도록 건강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의 필요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실제 건강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계속해서 소비하도록 만든다. 그 대표적 예로 건강검진 산업과 건강기능식품 산업의 팽창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건강(할 권리)을 누리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지금의 건강관에 내포된 문제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소비주의적 건강관은 지속불가능한 체제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건강관은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할수록 건강유지에 필요한 생태계 파괴에 일조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게 만든다는 역설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또 다른 역설은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중시할수록 오히려 그만큼 권력 약자들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경시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건강관이 노동생산성을 절대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체제의 공고화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건강관은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즉 건강하지 않은(쓸모없는) 몸으로 분류된 환자와 장애인, 노약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억압적 패러다임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추가로 결부된 신자유주의적 건강관은 모든 개인을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힘쓰는 기업가적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모두가 건강의 포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의무가 된 건강관리에 실패한 이들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존재로 매도당한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건강관은 차별과 억압의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위기를 비롯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 전환의 운동 전략으로써 대안적 건강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건강관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반자본의 관점과 논리에서, 젠더·장애·인종 등에 따른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 타파를 목표로, 서로의 건강이 의존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강의 사회성과 취약성의 윤리를 중심으로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건강관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질 변혁적 건강관이 체제 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소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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