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수(의료기기산업혁신연구회 산업이사)

[라포르시안]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 미국은 날로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하고 있다. 무역으로 하나가 되던 전 세계가 나뉘고 있는 분위기다. 2021년 발효된 미국 공급망 행정협정 14017은 자국 생산 시설 확충에 따른 내수 비율을 지정해 미국 내 제조를 독려함으로써 수입 장벽을 높이고 있다.

시장은 분권화되고 각 나라가 자국 제조업 보호를 위한 장벽을 높이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수출 경쟁력 확보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시장에서 의료기기 수출 경쟁력을 갖는데 필요한 정책은 당연히 국제조화다. 그간 우리나라는 의료기기업계와 정부가 함께 노력한 결과 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IMDRF)·아시아의료기기규제조화회의(AHWP)의 의장국이 됐다.

이처럼 우리가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있을 때 미처 살펴보지 못한 면이 있다. 바로 새롭게 의료기기 제조업에 뛰어든 업체들의 규제 장벽이 그것이다. 규제 강도가 세질수록 의료기기 안전성이 높아지는 반면 그만큼 업체 비용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신규 업체가 의료기기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는 요인 중 하나다. 국내 의료기기업체들이 내수보다 시장 규모가 크고 산업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제조사가 생겨나고 국내 의료기기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가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들어 의료기기 안전성 강화를 위한 ▲의료기기 재평가·갱신제 도입 ▲비임상 시험에 대한 GLP 성적서 의무화 ▲임상시험 및 GMP 강화 ▲공급내역 보고 ▲이식형 의료기기 의무 보험 가입 등 많은 규제 계획이 발표됐다. 이러한 제도가 국내 의료기기 제조사에 대한 맞춤형 정책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시행된다면 향후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다변화를 저해하고 행정적 비용부담도 크게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

예를 들어 최근 재평가를 통해 소량 생산되는 제품의 생산 중지가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해당 제품들이 대부분 국내 증례가 적은 질병군이며 시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업체 입장에서야 당연히 생산성이 낮으니 허가증을 반납하겠지만 그로 인한 불편은 환자와 병원의 몫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안전성 확보를 위한 GLP 성적서 의무화는 성적서에 대한 공신력이 높아진 반면 비용은 약 2~5배 증가했다. 결국 제품에서 차지하는 원가 비중이 높아졌지만 그 혜택이 누구에게 가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수의료기기 가운데 단종되는 제품을 위해 사용자가 수입할 수 있는 제도를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을 통해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이는 개별 업체가 하던 일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측면이 있다. 미국의 경우 새로운 제품이나 신생 업체를 대상으로 허가를 위한 등록 비용을 깎아주고 신규 제품에 대한 별도 인허가 절차를 수립하는 등 우대 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규제에 관한 정책이 정교하진 않지만 세계 10대 의료기기 강국에 진입했고 7위권이라는 목표를 설정한 만큼 소수에 의한 집중보다는 전체 생산설비를 늘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신생 또는 국내 제조만 수행하는 업체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드는 심사나 검사 비용부담을 높여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의료기기업체가 수출 중심으로 한다면 외국 규제기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료를 받게 하고, 국내 내수만을 한다면 거기에 맞는 성적서만 제출하게 하면 된다. 모든 업체에 GLP 성적서 의무화를 적용한다면 시험기관의 업무 효율성이 떨어져 비용은 증가하고 시험은 적체되는 이중의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은 물론 제조원가 상승에 따라 업체로서는 재투자 기회를 상실하고, 환자 또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규제가 늘어나면 행정 비용도 증가한다.

물론 의료기기업계가 지속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높은 규제와 비용 증가는 ‘규모의 경제’라는 늪에 빠져 결국 자본력이 있는 업체만이 시장에 진입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의료기기업체들의 수출 확대에 앞서 내수 시장 진입장벽을 낮추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정부의 규제개선과 함께 다양한 맞춤형 정책 시행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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