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의료연구회,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 발간

[라포르시안] #.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4층에서 진폐증으로 가정용 산소치료기를 달고 사는 할아버지는 대학병원이 15분 거리에 있어도 진료받으러 가기가 어렵다. 파킨슨을 앓는 아버지와 낙상 골절 후 와상 상태로 지내는 어머니, 두 부모님을 홀로 돌보는 아들은 병원에 모시고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장성한 4명의 자녀가 있지만, 연락을 끊고 지내는 대도시의 노부부는 5년 넘게 병원 진료를 보지 못하고 요양보호사가 동일한 약만 대리처방 받아오고 있다. 요양보호사가 퇴근한 저녁 시간에는 무릎이 굽은 채 누워 지내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할아버지가 수발한다. 

그동안 의료접근성 문제를 이야기할 때면 환자 중심의 의료이용 접근성 관점이 일반적이었다. 환자가 얼마나 쉽게 병원을 찾아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인식으로, 병원 수나 병원까지 이동거리, 이동시간을 판단지표로 삼았다.  

반대로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의료 접근성’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립된 곳에서 차별과 배제의 시스템을 혼자 힘으로 감당해야 하는 환자를 의사가 찾아갈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재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의사가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는 ‘왕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2019년 12월 말부터 거동불편자 의료접근성 개선을 위해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왕진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방문의료연구회가 최근 펴낸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 - 방문의료 이야기( 스토리플래너)'는 보건의료인이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의료 접근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역사회에는 여전히 보건의료인의 방문을 기다리는 거동이 불편한 고립된 환자와 보호자가 많다. 이 책의 저자인 방문의료연구회는 고립된 환자와 보호자가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방문의료연구회에 참여하는 구성원은 다양하다. 의사, 간호사, 작업치료사, 치과위생사 같은 보건의료인뿐 아니라 사회복지사도 함께하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처럼 한 명의 환자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선 의료, 돌봄, 복지의 영역이 아우러져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전문가들의 '인식 공동체'인 셈이다. 

저자들은 환자와 보호자가 자신의 살던 곳에서 행복하게 살다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주치의 그리고 방문의료서비스 제공자들이 하나의 팀으로 활동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 초고령사회를 걱정하고 노인 의료비를 걱정하지만 여기에는 비용, 수익, 효과, 과제에 대한 고민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저자들은 누구도 소외, 배제되지 않은 지역사회를 위해 방문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방문의료는 다학제 팀활동을 추구하며 방문진료(왕진), 방문간호, 방문재활, 방문구강, 방문영양, 방문약료 등으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는 방문 ‘진료’와 ‘의료’를 구분해 사용한다. ‘방문진료’는 의사가 진료실 밖 환자의 생활터로 찾아가는 진료활동을 의미하고, 일반적으로 왕진이라고도 한다. ‘방문의료’는 방문진료를 포함해 방문간호, 방문재활, 방문구강, 방문약료, 방문영양, 방문 사회복지 활동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직군의 활동을 총칭한다.

책의 1부 '방문의료, 이렇게 해봤어요' 편에서는 저자들이 실제로 방문의료와 방문진료 활동을 편 경험을 풀어냈다. 특히 방문진료를 통해 진료실에서 만나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닌 삶의 주체로서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방문진료를 나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족들의 표정은 어떤지, 누가 오가는지, 벽에는 무엇이 걸려 있는지, 바닥은 깨끗한지, 문턱은 얼마나 높고, 욕실 바닥은 얼마나 미끄러운지, 약은 제대로 보관하는지, 무엇을 드시는지 하는 것들이다. 통합적인 인간으로서 환자를 보게 된다. 환자의 삶이 눈에 들어오고 나면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교과서에서 중요하다고 외치는 포괄적, 통합적 진료가 가능한 것이다" <책 18~19p '방문진료를 해야 보이는 것들' 중에서>

이 책의 2부 '방문의료에 유용한 현장실무' 편에는 방문진료와 방문의료를 보다 효과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반드시 알야둬야 정보를 담았다. 

다양한 보건의료 전문가로 구성된 저자들은 그간의 방문의료 제공 경험을 바탕으로 ▲방문진료가 필요한 우리 동네 고립된 환자 찾기 ▲방문의료 가방 세팅과 서류 챙기기 ▲방문의료 스케줄링 ▲방문진료 환자의 정신질환에 대한 접근법 ▲식욕부진 환자에게 중요한 영양보충 ▲가정에서 안전한 수액치료 ▲욕창의 예방과 치료 ▲임종 환자와 만남 준비 ▲방문보건의료인이 알아두면 좋을 돌봄서비스 등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전달한다. 

방문의료 가방 세팅 정보를 보면 진찰용품부터 측정기, 소모품, 의약품 기타 필요한 물품 리스트와 용도를 저자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상세하게 기록해뒀다. 

겨울철 추운 곳에 왕진가방을 오래 두면 혈당계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따뜻하게 해주면 다시 작동한다는 정보부터 체중을 못 재는 경우 복부둘레로 측정하기 위한 줄자, 발톱 관리가 안 되는 환자를 위해 필요한 발톱 전용 니퍼를 준비물품으로 제시한다. 

접착식 벽걸이와 고리도 방문의료 활동시 준비물품에 들어 있다. 수액을 걸 곳을 도저히 찾기 어려운 집에서는 벽장이나 에어컨 등에 작은 벽걸이를 부작해서 수액을 걸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방문의료 경험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든 실무 아이디어다.   

여러모로 '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방문의료를 시작하려는 보건의료인, 돌봄 종사자, 지역사회 활동가 그리고 방문을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은 "나가보니, 다녀보니, 찾아보니 우리 주위에 고립된 이웃들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 의료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느끼게 됐다"며 "의료기관 중심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정책은 근처에 병원이 있어도 진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에게 공허하다. 이제는 의료인이 환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환자 접근성도 강화돼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 책을 발간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북펀딩 방식으로 조성했다. 북펀딩에는 220명 넘게 참여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