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덕환과 박하선의 열애설이 돌고 있다. 2011년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 같이 출연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사랑영화도 아니고, 두 사람이 연인으로 출연한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암으로 죽어가는 50대 여성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회한을 담은 가족영화이다. 두 사람은 실제로는 동갑이지만, 영화에서는 꽤 나이차이가 나는 남매로 출연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1996년에 나문희 주연의 4부작 특집드라마로 MBC에서 방영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이 드라마로 방송작가 노희경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소설로도 출간되어 쇄를 거듭하였다. 영화는 2010년에 나온 개정판 소설을 원작으로 민규동 감독이 연출을 맡아, 배종옥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불치병을 소재로 다뤘지만 초반부터 인물에 완전히 몰입되어 폭풍 눈물을 쏟게 하는 감상적 최루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인물들과 적절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며 디테일한 상황묘사에 공을 들인다. 영화는 리얼리즘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감정의 결을 켜켜이 쌓아 올린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동안 쌓아올린 구체적인 감정들이 툭툭 허물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에 젖게 하는 식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짠한 감동을 위주로 한 가족극이지만, 영화가 견지하는 리얼리즘적인 시선은 영화를 다르게 읽을 여지를 남긴다. 즉 영화가 담고 있는 말기 자궁암에 대한 묘사나 몰락한 의사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며, 치매노인의 간병에 대한 묘사도 아주 상세하기 때문에, 메디컬 드라마나 사회극으로 읽는 것도 가능해진다.

뒤늦게 발견된 말기 자궁암

영화의 첫 장면은 변기에 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이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채근으로 소변도 누지 못하고 일어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심한 오줌소태증상에다 생리도 없어진 주인공은 모처럼 산부인과를 찾는다. 본인은 물론 의사인 남편조차 정상적인 폐경으로 생각하여 오줌소태 약이나 타면 되려니 생각했던 것. 그러나 초음파 검사와 자궁경부세포진검사(Pap smear)를 한 산부인과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의사는 남편에게 자궁암, 그것도 이미 종괴도 엄청나게 커진데다, 임파선이나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된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오줌소태 증상은 자궁 위부터 생긴 종괴가 커지면서 방광을 누르게 되어 생긴 증상이었다고. 대학병원에서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술(MRI) 등을 더 검사하지만,  자궁암 말기라는 진단은 바뀌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수술도 소용없고, 환자 상태만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만류하였지만, 남편은 수술을 고집한다. 막상 열어보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고, 수술로 암을 다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방광을 누르는 큰 종괴만이라도 제거하여 환자의 고통이 경감시켜 주자는 의견이다.

남편의 주장은 말기암환자에게 완치가 목표가 아닌 증상 완화를 목표로 하는 완화수술(palliative surgery)을 제안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인정할 수 없어서 부리는 몽니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궁암이라는 사실은 말해주지만, 말기라는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한다. 아내는 당연히 초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자궁을 제거하는 수술만 받으면 낫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이제 애 낳을 일도 없고, 폐경 할 때도 됐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말하는 아내의 의연함이 오히려 딱할 지경이다.

그런데 막상 배를 열고 보니, 엄청나게 큰 종괴가 장기에 엉겨 붙어 있어 완화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수술팀은 종괴에 메스를 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배를 닫는다. 이른바 O&C(open & close) 상황이 된 것이다. 수술이 끝난 뒤 항암제를 투여하였지만, 환자가 쇼크 증상을 보이자 약물투여도 중단하고 퇴원조치 한다. 환자는 왜 항암제 투여를 하지 않느냐며 따지지만 의료진은 환자에게 가짜 약을 주며 답을 회피한다.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 온 환자는 오히려 입원 전에 비해 증상이 부쩍 악화된다. 통증으로 자다 깨서 바닥을 기어 다니고, 토혈을 한다. 그제야 죽음을 실감한 환자는 “여보 나 왜 이래?” 하며 공포에 울부짖는다. 초겨울에 진단받은 환자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는다. 일생 무뚝뚝함으로 일관했던 남편은 아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새집에서 그의 마지막을 지킨다.

가족의 희생으로 의사가 됐지만 의료사고 한 방에 몰락하다  

영화는 주인공의 가족관계를 촘촘히 그린다. 남편은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개업 의사이었지만, 8년 전 의료사고로 환자가 사망하자 몰락의 길을 걷는다. 개인의원은 폐업하였고, 정년을 앞둔 나이에 젊은 원장 밑에서 봉직의사로 일하면서 자존감을 잃었다. 아내가 오줌소태가 심하다며 남편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 하지만, 직장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생각한 남편은 다른 병원에 가라고 말한다.

그는 일에 있어서나 가정에 있어서나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스스로도 무능하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규정한다. 아내와는 무뚝뚝한 말 몇 마디가 전부이고, 아내의 병을 알고 난 뒤 그가 내뱉는 말들을 보면 아내를 불쌍하게 여기긴 했어도 존중하며 산 것 같지 않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도 아내의 손에만 맡겨들 뿐 살가운  교감이 없다. 어쩌면 매우 한국적인 아버지 상을 잘 보여주는 듯한 남편의 캐릭터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의사로서의 실패가 가족관계의 패착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이 의사가 되는 과정은 다른 가족들의 희생과 재원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홀어머니는 아들을 공부를 시키기 위해 억척스럽게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였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 아들은 부채감이 있고, 성공하여 보답하겠다는 마음이 크다.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에도 기대가 컸다. “부모 없이 자랐다”는 이유로 아내와의 결혼을 극렬 반대하였는데, 여기엔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며느리의 머리채를 쥐고 “병원 차려 준다더니, 맨 몸으로 시집 온 년”이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홀어머니가 아들에게 품었던 과도한 기대는 며느리에게 전이되었고, 며느리에게 품은 경제적인 불만들은 고된 시집살이로 표출되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부채감 때문에 둘 사이에 적절한 개입을 하지 못한다. 고부갈등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아내와 어머니 모두에게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성격으로 굳어졌다. 남편이 빠져나간 정서적 공백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직접 맞부딪히며 지지고 볶는 애증관계를 형성한다. 남편은 둘의 갈등을 못 본 척 하다가 둘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치달을 때만 비로소 더 큰 폭력으로 이를 저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개입은 시어머니에게 트라우마를 남기고, 아들에 대한 집착을 강화한다.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집착이 강한 어머니에게 아들의 의사로서의 실패는 곧 자기 인생의 실패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것이 여장부였던 어머니가 치매노인이 된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치매노인이 되어 며느리의 수발을 받으면서도 며느리에 대한 패악을 멈추지 않으며 아들의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 싶었던 자신의 한을 투사하며 며느리를 들볶는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은 시어머니뿐이 아니다. 친정 동생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적지 않은 재산을 누나가 혼자 차지하여 잘난 의사 사모님이 되고,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노름과 술에 빠져 누나와 아내의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동생이 말하는 부모의 유산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자기 몫의 재산을 탕진하고 내뱉는 생소리일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동생의 억지소리에 계속 얼마씩 돈을 내놓는 것을 보면 동생의 주장이  전혀 사실무근도 아닌 것 같다.

주인공의 남편이 의사로 개업하는데 친정의 재산이 어느 정도 소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생의 불만이 있었지만 개인의원을 하는 동안 푼돈으로 동생에게 생활비를 융통해주며 동생의 불만을 무마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개인의원이 망하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남매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한국의 의료상황에서,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오기까지 상당한 재원과 뒷바라지가 필요하다. 여기에 개인의원을 개업하는 데에는 꽤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이 자본은 대부분 가족들로부터 조달되며, 빚을 얻더라도 가족의 부담이다. 누군가 의사가 되어 의원을 개업하는 것은 가족들의 재원과 노동을 징발하고 집중시켜 벌이는 가족사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투입된 가족들의 기대와 노력은 ‘의사’의 경제적 성공으로 회수되고 보상받지만, 의료사고를 비롯해 수많은 경영상의 위험으로 인해 망하게 되면 기대와 보상은 받을 길이 없어진다. ‘의사’의 실패는 개인을 넘어 가족 전체의 실패가 된다. 가족 구성원들은 실패를 신체화하여 치매나 암 등을 앓거나, 이혼이나 형제간의 재산분쟁 등을 겪게 된다. 주인공의 가족의 실패는 다음 세대로까지 전이된다. ‘의사’라는 패밀리 비즈니스의 실패로 내홍을 겪으면서도, 주인공 가족들은 미대에 가고 싶어 하는 아들을 삼수까지 시켜가며 구태여 의대에 보내려 한다. ‘의사’ 성공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실패를 아들에게서 만회하려는 보상심리가 작동한 탓이다. 딸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다. 무뚝뚝한 아버지와는 달리 다정다감한 남자에게서 결핍되었던 부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의 간병은 왜 며느리 혼자 독박을 써야 하는가

영화는 치매노인의 행태를 상세히 보여준다. 밥을 달라 채근하고, 다짜고짜 머리채를 잡고, 자리에서 똥을 싸고, 개똥을 주워 먹는다. 주인공은 치매노인을 먹이고, 씻기고, 얻어맞느라 마음 놓고 화장실에 갈 짬도 없다. 그 탓에 암이 전신에 퍼지도록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치매노인의 간병은 오로지 주인공에게만 맡겨져 있었다. 가족들 중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불가피하게 외출할 때면 도우미를 불러 교대하였고, 병이 깊어지자 자신의 올케를 부른다. 치매노인의 간병은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시종 그의 몫이고, 도우미와 올케가 주인공을 잠시 대리할 뿐이다. 치매노인의 수발에 외부의 도움은 없다. 그만 요양병원에 노인을 맡기라는 친구들의 멀찍한 조언이 있을 뿐이다. 

치매노인과 이를 간병하는 며느리는 폐쇄적인 회로에 갇힌 채 서로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애증의 전쟁을 벌인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주인공은 급기야 시어머니의 목을 조른다. 그것은 일생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시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표출이기도 하고, 자신이 죽고 나면 더 돌봐줄 사람도 없는 노인에 대한 연민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는 무관심한 사회와 전혀 도움이 못되는 다른 가족들에 둘러싸여 철저하게 고립된 환자와 간병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학과 피학의 행위이다. <아무르>, <볼케이노>,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의 영화에서 아내를 간병하던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거나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파국의 묘사이다.  

그러나 치매노인의 간병은 애증이 범벅된 며느리에게만 맡겨놓을 성질의 일이 아니다. 주인공이 죽고 나자 가족들이 가사노동과 치매노인 간병을 나누어 하는 장면이 영화의 말미에 나온다. 그러나 치매노인의 간병이 가족들 간의 역할분담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인구노령화로 인해, 노인 빈곤문제와 노인 간병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치매를 비롯한 노인질병의 간병은 전사회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고, 노인인구의 보살핌은 보편적 복지의 확대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가족의 수발을 들며 있을 것 같던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며느리인 중년여성의 죽음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화인 동시에, 말기 암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더불어 ‘의사’라는 기대주의 몰락이 불러온 가족의 실패와 치매노인 간병이라는 녹록치 않은 문제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 헛헛하고 먹먹한 슬픔에 젖어보시라.

황진미는?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2002년에는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한겨레21>, <시사저널>, <비타민> 등에 영화 관련 글을, <한겨레 훅>에 법정르뽀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라포르시안의 '황진미의 라뽀&르뽀'란 고정코너를 통해 보건의료계, 혹은 의료시스템과 관련된 이슈를 진단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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