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가슴으로 말하라 / 황진복 지음 / 이담북스 펴냄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을 의학의 교과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북소리] 코너를 통하여 다양한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얻은 느낌을 소개해온 것처럼, 책읽기를 통하여 무언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싶지만 한발 더 나아가 의학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황진복 교수님의 <의학, 가슴으로 말하라>는 바로 그런 인문학공부의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좋은 의사’가 되기를 꿈꾸지만 자신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어 앞날에 대한 안목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의학도를 위한 자기계발강의록입니다. (…) 어딘가에 숨어있을 능력을 찾아 이를 흔들어 깨우고, 지나치게 웃자란 오해와 편견을 가지 쳐 없애 당신이 보다 ‘좋은 의사’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한 목적입니다.(11쪽)” 라고 적으신 집필의도에 공감하게 됩니다.

제가 의과대학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수능시험에서 상위권 성적으로 얻은 학생들이 의과대학으로 몰리고 있는 현상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머리가 좋은 분들이 연구와 진료 등의 의학분야에서 들어오셔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내면 우리나라의 의학수준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모두 의학에 쏠리는 현상은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의학은 수재형보다는 근면성실하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황진복교수님 역시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요즈음 분위기에 대해 이미 졸업한 의사들이나 의과대학생들 모두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의학이 홍수처럼 쏟아내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도 벅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평안을 준비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저자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의학, 가슴으로 말하라>는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의학에 접근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근대의학이 시작될 무렵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살펴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반으로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5세 여자 백혈병으로 사망, 오전 5시 45분’이라는 글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치 사망선고를 듣는 느낌입니다. 자신의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일은 어느 의사에게나 마음이 무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사는 ‘의사’라는 이유로 ‘사람’이 알아야 할 환자의 스토리에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23쪽)”라는 저자의 질문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백혈병으로 사망한 25세 여자는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시체도둑, 야반도주, 아동노동’이라는 제목의 글은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뼈아픈 자기반성이라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의학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시신을 기증하신 분들 덕분에 기초의학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장례를 치른 시체를 훔쳐서 해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에서 시체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습니다. 중세에 사체가 질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체를 훔쳐 약제로 팔았다는 이야기도 다루고 있는데, 이런 황당사건이 현대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요즘 우리사회에서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이 빠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현대의학을 교육하면서 조선인의 정신적 계몽이나 진보를 일깨울 인문학 교육을 배제한 것이 시초인데, 조선인은 단순 지식만을 배워 일상에서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안덕선교수님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사가 차갑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견제장치가 미흡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인문학이라는 비판자를 배제하자 과학과 기술의 힘은 더욱 거세졌으나 점점 그들의 속성을 빼닮아 차가워지고, 대학이 양산한 사람들은 기술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48쪽)”고 설파한 것처럼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의학 역시 과학의 행보를 뒤쫓게 된 것입니다. 즉 환자로부터 얻는 정보의 비중은 점차 낮아지고 환자로부터 얻는 숫자정보에 의존하는 진료가 되다보니 환자의 교감이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저자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니 의학의 본질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 시각을 가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저자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현재 사람의 수명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하면 거의 두 배나 길어졌는데, 인간의 평균수명을 늘리는데 의학이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주장(50쪽)은 지나쳐 보입니다. 근대에 들어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농업 및 유통의 혁명으로 먹거리가 풍부해진 것이 평균수명의 연장에 기여한 바가 의학의 기여보다 획기적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생제의 개발로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소독법 및 분만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모성사망과 신생아 사망을 극적으로 줄인 것은 분명 의학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린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밖에도 불치병이라 여겼던 암질환 가운데 상당수를 만성질환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역시 평균수명의 늘린데 대한 의학의 기여라고 하겠습니다.

의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과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에 대하여 찬반양론이 있으나 분명 응용과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의 논리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계가 있으니 그 이유는 과학과는 달리 인간이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학이 과학분야에서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환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빛을 잃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바로 지금이 변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도 혁신을 통해 변화해왔지만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폭도 점차 커지고 있어 거부하는 반응이 생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혁신의 부작용 사례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병원진료의 적정성평가에 관한 내용을 심각하게 읽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업무가 바로 병원진료의 적정성평가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의 환자사망률을 공개하게 되자 병원들이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상태가 위중한 중환자를 진료하기 않는 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병원의 진료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혁신적으로 시작한 적정성평가는 진료의 차별성이 없는 병원진료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옮겨보면, “평가는 진료 프로토콜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유도하여 의료과실을 줄일 수 있는 여건 조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각 병원의 차별성을 없애고 진취적인 진료를 봉쇄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89쪽)”

하지만 적정성평가의 기본틀에 대하여 다소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수술사망률을 공개하면서 병원계에 커다란 파장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평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환자진료에 소홀함이 없도록 중환자를 진료하는 병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적절한 보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적정성평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어 의학발전에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오해가 없으면 합니다. 다만 표준프로토콜을 적용한다는 점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시한 표준치료가 아닌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치료법을 차별된 치료라는 주장이 과연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1부에서 의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문학적 시각에서 조명했다면, 2부에서는 인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좋은 의사’가 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수재보다는 근면성실한 사람이 환자의 아픔을 같이하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앞서도 드렸습니다만, 저자 역시 의사가 되는데 필요한 요소를 의학지능이라고 부른다면 의학지능은 다중지능의 요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성찰지능, 대인친화지능, 논리수학지능의 논리지능, 언어지능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며, 논리수학지능의 수학지능, 신체운동지능, 공간지능, 실존지능 등은 활용가능성이 높은 지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좋은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의학지식은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이며, 여기에 다양한 능력을 더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 종류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의학지식의 습득에만 매달리다 보면 의사로서의 갖추어야 할 인성을 연마하지 못한 채 의업에 나서게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주제를 소통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반이 잘 모르는 의학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환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대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건강과 관련된 정보에는 일반인의 관심이 크기 때문에 건강정보가 가장 빠르게 대중화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요즈음에는 의학정보의 불균형이 많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의학지식의 권위는 종이호랑이가 된지 오래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은 진심을 담은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료과오로 소송을 당하는 의사의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참고하도록 귀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처럼 적절한 사과는 슬픔에 잠겨 있는 환자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점을 소개하는 다양한 책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책으로는 정재승과 김호교수의 <쿨하게 사과하라>입니다.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는 불행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가족들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 자신이 특별한 과오가 없다하여 사무적으로 대하다 보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환자와 가족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왜 있는지 생각해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료과오가 있는 경우에도 때를 놓치지 않는 진심을 담은 사과는 상황을 부드럽게 이끈다는 것을 <쿨하게 사과하라>의 ‘쏘리웍스! 사과는 반드시 먹힌다’에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환자를 진료하는데 있어서도 원활한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제롬 그루프먼의 <닥터스 씽킹>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이라 함은 의사는 열린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것이며, 환자 역시 자신의 질환에 관한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하고 의사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다양한 영역에 걸친 저자의 방대한 책읽기에 놀라게 되고, 책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서 얻은 주옥같은 내용을 엮어서 의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참고서로 꾸며낸 저자의 글쓰기에도 역시 놀라게 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알림> 『'양기화의 Book소리' 소셜댓글 이벤트를 당분간 중단토록 하겠습니다. 내부적인 검토를 거쳐 더 많은 독자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빠른 시일 내에 도서증정 이벤트를 재개토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