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민우회의 ‘산부인과 바꾸기 프로젝트’가 남긴 교훈

최근 대한산부인과학회가 ‘산부인과’의 명칭을 ‘여성의학과’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키로 결정했다고 한다. 임신·출산을 위주로 하는 진료과라는 인상을 없애고, 임신과 관련이 없는 10대 소녀나 비혼 여성들도 거부감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하다. 한편으로는 출산율저하로 분만자체가 줄고, 채산성과 위험부담 등으로 분만실을 폐쇄하는 병의원이 늘고 있으며, 비만관리나 미용 등으로 진료영역을 전환하는 산부인과 의원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산부인과의 여성의학과로의 명칭변경은 생존과 경쟁을 위한 돌파구처럼 느껴진다.

산부인과진료가 기존의 임신·분만 등 산과위주의 진료에서 초경의 소녀부터 폐경이후 골다공증관리까지 여성 질환을 다루는 부인과진료로 전환되는 것은 인구학적인 요인으로 보나, 수요자들의 요구로 보나, 공급자들의 경영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즉 ‘산부인과 바꾸기’는 외부의 요구이기 이전에 내부적 자구책이 된 셈이다.


■ 선정적인 기사로 먼저 도착한 ‘산부인과 바꾸기 프로젝트’ 지난 10월 11일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산부인과 바꾸기 프로젝트’ 토론회가 열렸다. 산부인과 이용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산부인과 이용의 불편함과 개선점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발표에 앞서 지난 7월부터 <한겨레> <오마이뉴스>등의 매체에서는 조사 중 드러난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불편한 경험들이 다소 선정적인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부부관계 만족 위해 수술 하시죠” 굴욕 주는 의료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0616.html 등)

관련 기사에서는 접수대에서부터 낙태경험과 성관계 유무를 묻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산부인과 진찰대에 누웠을 때 굴욕감과 불쾌함을 느낀 사연, 질성형 등을 권유받았다거나, 분만 때 인턴들이 참관을 하여 인권침해를 느꼈다는 등의 불만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질문은 매우 민감하고, 개인에 따라 성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진 시 더 섬세한 배려가 요구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산부인과에 대한 불편한 경험의 토로가 여과 없이 기사화되면서, 진료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까지 ‘불편사항’으로 논의되면서 마치 산부인과 진료자체에 엄청난 문제가 있는 듯 비춰지기도 하였다.

특히 자궁경부암 검사에 앞서 “결혼 안 했으면 처녀막이 상할 수 있으니 검사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처녀성’ 운운하는 발언이라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진료실에서 “첫 경험이 언제인가”, “남자친구 말고 섹스 파트너가 있나” 등 성관계에 대한 상세한 질문을 의사가 아무렇지 않게 묻는 것에 당혹했다거나, 진찰대를 ‘쩍벌 의자’. ‘굴욕 의자’로 표현하며 “진찰대에 다리를 벌리고 올라가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해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응답자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식의 보도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산부인과 진료의 특성상 개인의 성생활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고, 결혼이니 처녀막이니 하는 순결이데올로기적인 발언은 의사의 관심사라기보다 환자들의 이해나 관심에 맞추기 위한 발언이기 쉬우며, 진료의자의 경우 어느 진료과이든 진료부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법이다. 전 세계에서 동일한 진료대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 바뀔 가능성도 없다. 그런데 산부인과 진료대 자체를 끔찍한 경험으로 말하고 그 표현을 그대로 옮겨 기사화하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여성들의 공감을 쉽게 얻을 수는 있지만, 산부인과의 불편함을 개선해 거부감을 없애고자 하는 ‘산부인과 바꾸기 프로젝트’의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실제로 10대 청소녀나 미혼여성들 중에는 심한 생리통이나 월경과다 등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산부인과를 가지 않고 증상을 키우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어린이들에게 치과에 가는 공포를 줄여주기 위해 치과가 두려운 곳이 아니라는 내용의 그림책이나 노래를 통해 치과치료를 기피하지 않도록 교육하듯이,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낮추어 10대 청소녀들이 불편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산부인과를 내원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홍보가 시급한 실정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의 기사는 산부인과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낳게 된다. 아직 산부인과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산부인과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구체화시키거나 산부인과를 한두 번 경험한 사람에게는 모호한 주관적인 느낌을 모두‘불쾌함’으로 환치시켜 부정적 인식을 고착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걸 심리학에선 ‘프레임의 힘’이라고 부른다.

산부인과 진찰대에 대한 느낌은 처음 접할 때는 무척 당혹하고 민망하지만, 몇 번 접하고 나면 부정적인 느낌이 다소 누그러진다. 적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굴욕의자’, ‘쩍벌 의자’라는 용어를 접하고 나면 거부감이 줄어들지 않거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스스로를 내면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산부인과 혹은 산부인과를 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도 더욱 고착화될 가능성도 커진다.

산부인과에 가는 것을 여느 과나 마찬가지로 그냥 진료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산부인과를 가면 ‘수치스러운’ 질문을 받고, ‘쩍벌’ 의자에 앉는다는데, 10대 소녀가 거기에 왜 갔을까? 거기서 무슨 진료를 어떻게 받았을까?”같은 사회적 낙인을 더 증폭시키는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성생활에 대한 상세한 질문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일반적인 여성의 성인식이라고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진료실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논해질 수 없을 만큼 여전히 금기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의사와 문답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논하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옳지 않기 때문이다. 

■ 예진용지와 문진매뉴얼을 만들자!

한국여성민우회가 최종 발표한 자료집에는 1,0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담겨있었다. 그동안 국내에 산부인과 이용실태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 응답자의 62%에 해당되는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가기 전 망설였다고 대답하였다.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던 산부인과에 대한 거부감을 뚜렷이 알 수 있는 수치이다. 응답자의 47%가 처음 산부인과를 갔던 이유가 임신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임신여부와는 무관하게 여성건강을 위해 쉽게 찾는 진료과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부감의 내용을 묻는 질문에는 68%가 진료자체의 두려움을 꼽았고, 사회적 시선 때문에 불편하다는 응답이 22%였다. 산부인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개선보다도 진료실 내에서 진료방식과 문화를 개선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자료집에는 주관식으로 기입된 생생한 불만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 불만의 목소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의료진들이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대목도 분명히 있지만, 성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용어가 정리가 되지 않거나 의사와 환자간의 권위와 정보 불균형과 신뢰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해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가령 “36세에 임신했는데 노산이고 양수검사 하라고 했음”이라고 답한 경우도 있었는데, 만35세 이상의 산모는 고령산모로 분류되어 염색체 이상의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양수검사의 적응증이 되며, 의학적 기준에서 정당한 진료였지만 응답자는 불편한 기억으로 꼽은 것이다.

접수창구에서 “성경험 유무”를 질문 받아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대답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굳이 접수창구에서 소리 내어 물을 이유는 없다. 접수대에서 용지를 나누어주고 스스로 기입하게 하면 된다. 용지에는 질경의 삽입이나 질초음파 검사의 단면도와 함께 삽입성교의 경험이 없으면 이 검사를 할 때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적고, 삽입성교 유무를 직접기입하게 하면 된다. 용지에 낙태 유무, 임신·출산 횟수 등 산과력을 묻는 항목도 직접기입하게 하면 된다. 초경이 언제 시작됐는지 월경 패턴은 어떤지 하는 질문이나 현재 성관계를 하는지, 파트너가 다수인지 등의 질문항목도 넣는다. 혼전성관계가 매우 보편적이고 섹스리스부부나 혼외관계도 많은 상황에서 “결혼의 유무”를 “성관계 유무”와 결부시켜 사고하거나, 성관계 유무를 결혼했냐는 질문으로 우회적으로 물어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관계 역시 삽입성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성애 섹슈얼리티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성관계=이성애 삽입성교’라는 고정된 사고에서 질문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런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산부인과 예진 시 행해지는 질문의 용어를 통일하고, 질문의 예문을 만들고 틀린 질문과 수정 질문으로 이루어진 정오표를 만들어 질문양식을 매뉴얼 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성민우회에서는 “필요정보 습득 이유에 대한 사전 설명과 서면 작성, 의과(산부인과)대학 교육과정 내 인권 감수성 교육 포함”등을 요구하였지만, 교육에 앞서 산부인과 학회나 의사회 등에서 지금 당장 착수해야 할 작업은 접수대에서 나누어줄 예진용지를 만들고 질문정오표를 포함한 문진매뉴얼을 만드는 일이다.

산부인과 진료대에 대한 불만도 개선할 여지는 있다. 하의를 벗은 환자가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진료대 주위 공기를 따뜻하게 히터를 틀든가 진료대나 초음파젤 등을 따뜻하게 덥히거나 진료대 포나 갈아입는 치마 등을 청결히 유지하는 등의 노력은 진료대에 대한 불편함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미혼일수록, 최초진료연령이 30세 미만일수록 거부감 높아

설문조사에서 나타나는 불만사항 중에는 어느 진료과에 대한 불만과 마찬가지로 비용이나 시간에 대한 것도 어김없이 있었다. 보험적용이 안 되는 진료가 많고 추가검사 등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저수가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데다, 꼭 필요한 진료도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공급자 측에선 보험진료의 저수가를 보상받기 위하여 비보험  항목을 늘리게 되는데, 이는 비단 산부인과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산부인과는 예기치 못한 응급상황의 발생과 그로 인한 소송이 가장 많은 진료과로, 이에 대한 방어 진료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많다. 그 결과 비급여 검사 등이 많아지게 되는데, 환자의 입장에서는 과잉진료로 인식되어 병원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지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여성단체에서는 산부인과에 대한 경제적 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산부인과 진료와 검사 중 국민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항목은 무엇이며 얼마나 자주 처방되는 항목인지를 파악한 다음, 산부인과 의사의 자문을 받아 의학적 필요성이 분명한 경우 정부에 국민건강보험적용을 적극 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문조사에서 의사가 진료내용을 쉽게 설명해주었는지를 묻는 항목에는 75%가 그렇다고 답했다. 설명의 만족도도 5점 만점에 3점 이상을 준 응답자가 72%나 되었다. 설문지에는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자궁경부암 백신, 질 성형, 태반주사에 대한 권유를 받았는지를 묻는 항목도 있었다. 자궁경부암 백신을 제외한 질성형이나 태반주사에 대한 병원의 권유는 4-5%로 미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태반주사의 권유를 받은 경우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이 증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부감은 그 외에도 미혼일 때와 산부인과 최초진료 연령이 30세 미만일 때, 그리고 의사의 쉬운 설명이 없었을 때 높게 나타났다. 10대와 20대 미혼여성의 산부인과 진료가 얼마나 환자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자 트라우마로 남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산부인과가 개명과 더불어 여성의학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젊은 미혼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얼마나 더 시급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인턴은 학생이 아니라 의사!    

설문에 나타난 불편사항 중에는 분만과정에 인턴이 참관하는 것을 불쾌한 경험으로 꼽은 대답도 상당수 있었다. 대답에는 ‘인턴 또는 의대생’, ‘인턴과정의 의대생’ 등으로 표현되어 있을 정도로, 인턴과 의대생을 구분하지 않았다. 설문조사를 진행했던 여성민우회는 발제문을 통해 최근 대학(수련)병원이 아닌 한 병원에서 산모의 동의 없이 의대생들이 출산과정을 참관하도록 한 사건에 대해 산모 측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법원판결이 있었음을 밝히면서, 대학(실습)병원의 산부인과 진료에서도 수련의 동행에 대해 사전에 설명하고 동의서를 작성할 것을 의무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는 대학병원의 설립목적이 진료보다 교육과 연구에 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으며, 인턴은 학생이 아니라 진료팀의 일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진료현장에서 인턴은 물론 레지던트까지도 환자나 보호자에게 신분이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인턴은 학생이 아니라 면허를 지닌 의사이며, 레지던트는 견습의사가 아니라 입원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맡은 전공의사이다.

이토록 엄연한 사실이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자주 오인된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환자나 보호자들이 이를 오인하는 것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제대로 된 이해를 구축하는 것 역시 의료인의 몫이다. 특히 최근에는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부족하여 인턴이 레지던트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턴의 신분과 역할을 산모나 보호자들에게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교수들이 직접 인턴을 의사로 환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며, 교수나 간호부서 등이 인턴을 의사로 대우하는 것이 인턴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데 근본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의대생 실습의 경우, 2010년 출산관련 온라인 카페에서 “산부인과 진료 시 공부를 목적으로 제3자가 참관하는 경우, 임산부의 동의를 받도록 명문화하는 것”을 요청하는 서면운동이 전개될 만큼 산모들의 거부감이 크다는 점을 상기하면 학생의 참관 시 설명과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분만의 특성상 진통하는 산모에게 참관에 동의한다는 동의서를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동의서 작성은 산모가 입원할 때 대학병원은 교육의 목적을 지닌다는 설명과 함께 “필요한 경우 교육용 참관이 있을 수 있다”는 사항을 적은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갈음하는 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 산부인과 이용 현황 조사결과의 딜레마

           산부인과 이용에 관한 불편한 기억을 적는 설문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가장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심리적 접근성이나 경제적 접근성보다 물리적 접근성의 문제이다.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기존의 산부인과 병의원들도 경영나과 인력나으로 인해 분만실을 없애고 피임이나 호르몬 관리, 나아가 다이어트나 미용 등으로 진료영역을 전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여성의학과로의 개명은 그러한 변화에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속될 경우 수도권을 벗어나면 분만실은커녕 산전관리를 받을 의료기관 마저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우려는 일부지방에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수도권의 경우도 분만이 가능한 병원이 크게 줄어들고, 강남 등의 지역에서 이미 보듯이 분만을 전문으로 하는 몇몇 병원이 특화되면서 독점으로 인한 상업화가 가속될 전망이다. 여성민우회에서도 이를 의식하여 “지역별 최소 산부인과 분만실 및 진료가능 병원 확충”을 요구사항 중 마지막에 넣었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이를 강제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재원을 마련해 지역마다 국립 산과병원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인력의 확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련병원에서 산부인과가 비인기과가 된지 벌써 15년이 넘은데다 진료의 행태가 한번 상업화로 흐르기 시작하면 굳이 힘들고 위험한 길을 택해 지역에서 인술을 펴려는 전문 인력을 좀처럼 구하기 힘들어진다. 더구나 분만수의 감소로 인해 의대 실습과정이나 인턴과정을 통해 분만을 지켜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접하는 경험도 점점 줄어들어 앞으로도 산과 의사를 하겠다는 지원자들은 더 줄어들 것이다.

여성단체에서 산부인과에서 느낀 불편한 경험을 조사하여 발표한 것은 좋은 일이다. 이를 통해 산부인과가 개선점을 찾고 심리적 문턱을 낮추어 진료를 받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은 의료소비자의 입장에서나 의료공급자의 입장에서나 좋은 일이다. 요즘 같은 경쟁시대에 소비자들의 이용실태나 생생한 불편사항을 모으는 작업은 공급자들이 돈을 들여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사결과는 딜레마를 지닌다. 여성민우회는 산부인과를 이용하는 여성들의 불편을 드러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 작업을 수행하였지만,  이를 가장 잘 활용할 주체는 여성전문병원을 표방하며 상업화의 길을 걷는 병원들이다. 이들은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불편사항들을 토대로 ‘고객응대’ 노하우를 가장 먼저 개선할 것이다. 어쩌면 10대 20대 미혼여성들의 부인과진료에 대한 시장조사에 착수하여, 수요예측이 끝나는 대로 부인과진료와 에스테틱이 결합된 형태의 <미혼여성들을 위한 토털여성클리닉>이 팬시한 프렌차이즈 의원으로 등장할지 모른다.

여성민우회는 산부인과에 대한 거부감을 묻는 설문에 태반주사, 질성형, 자궁경부암 예방백신에 대한 권고를 묻는 항목까지 별도로 넣을 만큼 의료상업화에 대한 높은 경각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설문조사가 알려준 그 많은 불편사항들을 영리하게 피해가면서 징그럽도록 친절한 ‘여성의학과’가 상업화의 한길로 내달릴 때 여성민우회는 어떤 감흥에 젖을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씁쓸해진다.

황진미는?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보건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자격도 취득했다. 2002년에는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한겨레21>, <시사저널>, <비타민> 등에 영화 관련 글을, <한겨레 훅>에 법정르뽀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라포르시안의 '황진미의 라뽀&르뽀'란 고정코너를 통해 보건의료계, 혹은 의료시스템과 관련된 이슈를 진단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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