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진료실 단상>

2000년 의약분업이 실시된 이후 소위 쌍벌죄라고 불리는 의료법 개정을 포함한 많은 정책들이 시행 혹은 시도되면서 정부와 의사집단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의사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불합리한 정책을 왜 정부가 강행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보험재정의 악화가 한 가지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의약분업이 시행된 이후 약제비 총액은 1999년 3200억원에서 2001년 4조6000억 원으로 급증했으며, 2010년에는 무려 11조 4800억원으로 엄청난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약제비 증가에는 고령화 인구의 증가, 고가의 신약의 개발과 같은 요인에 의한 영향이 있겠지만 의약분업 자체가 상당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보험 재정 절감이 목적일 수는 있어도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의료비가 급증할 것이라는 의료계의 주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이유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의사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유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한 문의를 외래 환자 혹은 친구나 동창들에게서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권위 있는 대학병원에서 환자의 검사 기록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진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아는 의사와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 사이에는 이렇듯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정부가 쉽게 의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힘들어진 측면도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불신은 과거에 검사 시설이 없이 직감으로 진료하던 진료방식이 근거중심주의 의학으로 바뀌면서 검사가 증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마치 불필요한 검사를 하는 것처럼 오해를 산 측면도 있다. 또 워낙 저수가이다 보니까 짧은 시간에 충분한 상담을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한 불만이 누적 된 것과 같은 구조적인 측면도 있다. 그리고 10만이 넘는 의사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진료를 하다 보니 극소수의 의사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정인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 개인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가진 미국과는 달리, 과거 문중이 중시되었던 우리 풍토에서는 그 개인의 문제점을 그 집단의 특성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의 범인이 한국계라는 점에서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정작 미국에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교포들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없었으나,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두 명의 여중생이 사망하였을 때는 미국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가 일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문화가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혹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의사집단이 받는 사회적 이미지의 추락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이때마다 의료계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의사는 동료의 편만 든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 의료계의 숙원 중의 하나가 회원 징계권을 복지부에서 가져오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국민들이 의사는 어떤 경우에도 처벌받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주장하는 궤변으로 치부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의사가 가져야 할 도덕성과 의무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생각할 때 의사들의 내부 정화 기능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의료인의 도덕성 문제는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입원한 신생아가 귀찮게 한다고 의사들이 신경안정제인 페노바비탈을 투여한다고 비난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 여론이 들끓다가 소아과 의사들이 신생아 황달 치료에 필요한 약이라고 반발하면서 무마된 적도 있다.

반대로 환자에게 불필요하거나 해로울 수도 있는 수술을 권하는 경우도 동료 의사가 아니면 판단(peer’s review)이 쉽지 않다. 따라서 동료 의사들의 판단에 따른 자정 기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의사는 아니지만 황우석 사건처럼 데이터를 조작하는 경우라면 이 역시 동료 의사들의 검증을 거쳐 엄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정 기능의 강화는 의사를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과거 보라매 병원 사건처럼 환자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자의퇴원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의협의 윤리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가 활성화되었다면 재판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윤리규정은 의사라는 업무와 관련된 분야에 국한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업무와 무관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반 민법과 형법의 적용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재 의협에 면허나 업무 정지 혹은 취소를 할 수 있는 징계권은 없으나 명예를 중시하는 의사들의 특성으로 볼 때 의협의 징계가 가져오는 심리적 압박감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의협의 자정선언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선 자정 기능의 강화를 위해서는 윤리규정을 강화해 보급할 뿐 아니라 변호사회에서 회원이사가 회원 징계를 맡듯이 윤리위원회의 위상과 규모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특히 윤리위원회가 전국의 10만이 넘는 의사들을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각 시도 의사회 산하에도 조직을 구성하고 사안의 경중에 따라 의협에서 혹은 지역 의사회에서 맡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지역 의사회가 맡기에 부담스러운 사안은 처음부터 의협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적절한 역할 분담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도 회장단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전담할 팀(태스크포스)을 구성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짜고 어떤 점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겠다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후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 시도 의사회를 순회하며 수 많은 토론을 통해 중지를 모으고 우려를 표명하는 회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언론을 통해 ‘깜짝 보도’식으로 선언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 의협 회장의 임기는 3년으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따라서 충분한 논의와 설득을 통해 항구적인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는 기간인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다가 회원들의 오해를 사서 갈등만 증폭되거나 만에 하나 선언으로 끝나버리게 된다면 차라리 안 하기 보다 못한 결과가 될 것이다.

흔히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은 것이며,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한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민족이 힘이 없어 나라를 잃었다고 탄식하며 지식, 신용, 경제의 3대 민족자본 육성론을 편 바 있다. 특히 도산은 그 중의 으뜸으로 신용의 자본을 꼽았다. 이제 보다 강하고 건강한 의료계가 되기 위해 신용의 자본을 육성하는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현석은?

1986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사1994년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수료 및 전문의1998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박사2006년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이사2011년 광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의료커뮤니케이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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