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며, 의료를 적정하고 공정하게 시행하여 사람의 건강을 보호증진함에 헌신한다'의사윤리강령의 첫번째 항목이다. 우리나라 의사윤리강령은 1997년 4월 제정된 이후 2006년 전문 개정이 이뤄졌다. 의사윤리강령은 의사의 일반적 권리와 의무, 환자와의 관계 및 사회적 역할, 시술과 의학연구에 있어서 의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의사윤리강령은 그 선언적 내용만큼이나 존재감 역시 선언적이고 상징적 수준에 그쳐왔다. 의사들의 비윤리적 행위가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조차 의사윤리강령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의사윤리강령의 항목을 상세화화고 구체화한 것이 의사윤리지침이지만 이것 역시 사문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의사윤리강령이나 윤리지침의 존재조차 모르는 의사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한의사협회가 회원들에게 고도의 윤리적 수준을 요구하는 동시에 비윤리적 행위를 한 회원을 제재하는 내용의 자정선언문을 마련해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의협이 준비 중인 자정선언문에는 작금의 현실을 반영해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강도 높은 수준의 의사윤리 지침이 담길 듯 하다. 그동안 밖으로만 향하던 칼날을 의료계 내부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의협이 내부 자정을 위한 강도높은 의사윤리 선언을 마련한 배경에는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의사사회의 강력한 내부 자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외부에 의한 강제적인 제재와 압박이 더욱 심화될 것이란 위기의식의 발로다.

최근 들어 잇따라 의사가 연루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가 불거졌다. 개중에는 의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비윤리적 행위를 저지른 사건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의료윤리를 법으로 강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성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의 의료기관 취업을 10년간 제한 하는 법이 시행에 들어갔고, 살인과 시신유기 같은 중범죄를 저지를 의사의 면허를 영구 박탈하는 쪽으로 의료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의료윤리를 법으로 강제하려는 움직임은 의사사회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적 여론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까지 의사사회가 보여준 무기력한 내부 자정이 결국 법적 제재를 통한 강제적인 의료윤리 확립의 필요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나친 피해의식과 왜곡된 동료 의식이 더해지면서 의사들의 비윤리적 의료행위와 범죄에도 도를 넘은 관용과 이해심을 베푼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의협의 자정선언문이 의사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의료인을 향한 과도한 규제와 불합리한 정책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의협이 먼저 나서 윤리의 족쇄를 채우려 하냐는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의사사회가 전문가 단체로서 자발적으로 고도의 직업윤리와 행동규범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결국 주어지는 것은 외부에 의한 타율적인 강제 뿐이다.

의사에게 의료행위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이 주어진 만큼 그에 상응하는 고도의 의료윤리를 스스로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료계 내부적으로 고도의 자정능력을 갖출 때 전문가 단체로서 자율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만일 그것을 부정하고 회피한다면 의사사회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억압적 의료정책과 규제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의사사회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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