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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Book소리]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에코의 기호학'에코의 기호학 / 연희원 지음 / 한국학술정보 펴냄

TV가 동네에 한 두 대 밖에 없어 김일선수의 레슬링시합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TV있는 집에 모여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TV가 없는 집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주로 라디오에 의지하였는데, 이는 일제 침략기와 6.25동란을 거치면서 바깥세상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라디오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전해주었지만, 드라마, 공개방송 만담 프로를 통하여 재미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광팬이셨던 부모님 덕분에 일찍부터 라디오 드라마가 주는 상상의 세계를 즐기곤 했던 제게는 드라마 주제가까지도 관심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60년대 후반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주제가로 기억합니다만, 장미화씨가 부른 “모래 위에 누워서 휘파람 불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은하수, 손을 흔들면 잡힐 듯한 그 모습…”이라는 가사의 <뜨거운 연가>는 지금도 여름이 지나 가을의 문턱에 이르면 생각나곤 합니다. 당시 인기를 끌던 드라마 주제가를 많이 부른 이미자선생님의 ‘섬마을 선생님’이나 ‘황혼의 부르스’ 등은 당연히 18번으로 부를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여건이 안돼서 정통 클래식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한 저는 젊은 시절에도 어렸을 적부터 익숙한 대중음악을 많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클래식에 조예가 깊으셨던 한 선배님은 ‘대중음악은 지나가는 바람같은 것으로 관심을 둘 가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중음악을 하찮게 생각하셨던 그 분이 언젠가 ‘야, 이미자씨 노래가 아주 좋더라’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옛노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기억들이 있어 ‘미학과 대중문화로 풀어낸다’라는 부제가 달린 연희원교수님의 <에코의 기호학>에 관심이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기호학(記號學, Semiotics)은 기호에 관한 일반적 이론을 만들어내는 학문으로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법과 이해되는 방법도 연구한다고 합니다. 특히 생물기호학은 생명체 사이의 소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물체들이 자신만의 기호 세상에서 적응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을 연구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만 기호학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대중문화의 미학적 해석에 관하여 정리한 뒷부분과 움베르토 에코가 기호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세우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에 집중해 기호학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순수예술이라기보다는 매스미디어문화이다’(235쪽)이라고 규정하여 사회현상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대중문화가 도덕적 심각성이나 미학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는 개탄스러운 것(237쪽)’이라는 엘리트 예술주의자들의 시각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점에서 순수예술이라고 분류하고 있는 문화적 현상들 역시 처음 소개될 당시만 해도 기존의 문화적 패러다임으로 보면 파격적인 대중문화로 취급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떻든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1970년을 전후하여 롤랑 바르뜨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이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전통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대중문화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박(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새로운 문화적 현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전통예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회화를 비롯하여 새롭게 등장한 문화예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등에서의 다양한 미학적 판단기준을 소개할 뿐 아니라 대중문화가 가지는 한계는 물론 새로운 시각까지도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기호학뿐만 아니라 건축학, 미학도 강의하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라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부터 현대의 대중문화와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 이르기까지 미학, 기호학, 문학, 에세이, 문화 비평 등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철학자로서 현대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로 그려보려는 생각을 구체화한 첫 번째 작품이 <장미의 이름>입니다. 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의 장서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통하여 중세교회의 난맥상을 파헤치면서도 서책과 도서관에 대한 에코의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미로와 도서관에 대한 이미지의 유사성을 보면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수의 작품에서 미로를 하나의 구성요소로 차용했던 보르헤스를 따라 에코 역시 <장미의 이름>에서 기호학적 요소를 가미한 미로를 중요한 구성요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의 효용성을 미로에 비유한 에코의 견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에코는 고전적인 선형미로, 르네상스 이후 만들어진 도상미로 그리고 최근 나타난 그물망 미로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서 복잡한 구조로 발전해온 미로의 전형을 나누고 있습니다.

에코는 문화가 예술과 예술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키치(kitsch)적이어서는 안된다는 한계를 긋고 있기도 합니다. “키치는 오히려 미학적 체험이라는 외투를 걸친 채 예술이라도 되는 양 야바위치면서 전혀 이질적 체험을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감각을 자극하려는 목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작품을 가르킨다”라는 에코의 주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키치라는 단어는 19세기 중엽에 독일어에서 생겨나 다른 언어로 확산된 것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키치가 존재하는 힘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 있음을 간파한 쿤데라는 공산주의가 일반대중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위장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면을 키치적이라 규정하고 이를 벗겨 공산주의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연희원 교수님은 에코의 철학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기호학에 대한 토대를 쌓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호학에 대하여 에코가 기여한 바는 모든 문화적 과정들을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서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호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의미작용이라는 근원적 체계가 전제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에코는 그의 <기호학 이론>을 통하여 수많은 문화현상들 중 미학적 의사소통과정의 일반모델과 예술작품의 구조를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에코는 기호란 “어떤 것을 어떤 사람에게 어떤 점이나 어떤 능력면에서 대신하는 것”이라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S. 퍼스의 정의와 기호의 내적 구조를 다루면서 기표와 기의를 말한 소쉬르의 정의를 보다 발전시켜 기호-기능을 두 개의 기능소, 즉 표현국면과 내용 국면 사이의 상관관계로 보려고 한 예름슬레우의 정의로 종합하려 노력했다(55쪽)는 것입니다. 즉 유럽의 구조주의적 기호학과 퍼스의 기능적 기호학을 아우르면서도 기호의 해석과 생산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본성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고 연희원교수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코는 “기호란 일반적으로 언어에서 보듯이 의사소통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즉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 혹은 내적인 상태를 다른 존재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생산해 내는 의사표시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달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가 그러한 표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특정한 규칙을 지닌 약호(code)가 있어야 한다.(56쪽)”고 하는데, 사전과 언어를 포함한 다양한 기호들이 약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코는 기호의 해석에 추리적 성격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의 이런 견해가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추적자 윌리엄수도사가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난 기호들을 종합하여 사고한데서 구하였다는 설명을 하면서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다.[장미의 이름(하) 872쪽]”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기호학에 대한 에코의 신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에코가 규정하고 있는 기호해석과정에서의 추리적 성격은 의학부문에서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점입니다. 옮겨보면, “환자의 얼굴에 빨간 점들이 줄줄이 있는 것을 홍역이라거나 어떤 특정한 병으로 관계 짓는 의학적 증상들…(77쪽)”이라고 적은 구절을 읽다보면 환자가 나타내는 다양한 증상들이나 환자로부터 얻은 검사소견들 모두 환자 자신의 신체가 나타내는 건강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기호라고 상정할 수 있으며, 환자가 나타내는 다양한 기호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제대로 된 치료방향을 정할 수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보면 의학 역시 기호학적 연구의 정수가 모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희원 교수님은 예술이나 미에 관심을 두면서 생겼던 의문점들, 하나의 그림이나 음악이 주관적인 감정이나 주관적인 생각을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오늘날의 대중예술과 문화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에코의 미학을 연구하면서 정리하면서 얻은 사유의 결과를 <에코의 기호학>에 담고 있습니다.에코의 기호학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요약하면 기호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형식을 제시하여 해석학적 진전을 가져왔고, 기호학의 인식론적 정당성을 제시했다. 기호에 대한 해석은 과학적 발견과 마찬가지로 논리적 추리를 행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였고 기호로서의 언어의 연구의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예술과 대중문화의 관계나 예술과 미의 보편적 전달가능성에 대한 에코 기호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에코 기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호가 지니고 있는 철학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코의 기호학적 방법론과 세계관을 적용하여 예술과 미의 보편적 전달가능성에 대한 기호학적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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