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지음 /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펴냄

요즘 조선일보에서는 101명의 명사들이 추천한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101 파워 클래식]을 주간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면으로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을 초대하여 교감하는 북콘서트를 열기도 합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소개하는 북콘서트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면서 고전문학 읽기에 눈을 뜨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101 파워 클래식]에서 열한 번째로 소개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소개하려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예견한 듯 한 오스카 와일드의 선견지명과 그가 그려낸 동안세계의 슬픈 결말은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새겨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21세기로 넘어올 무렵 무심히 지나쳤던 ‘세기말(世紀末)’이라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서 ‘세기말(世紀末)’의 의미를 찾아보면, ① 한 세기의 끝, ② 유럽, 특히 프랑스에 절망적, 퇴폐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19세기 말기의 사조, 그리고 ③ 사상이나 도덕, 질서 등 모든 면에서 사회가 부패하고 어지러워져 몰락하여 가는 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요즈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분위기는 바로 세기말적 분위기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발표된 1890년 영국은 빅토리아여왕의 재임 후기(1870년~1901년)로 대영제국이 지구상 육지의 4분의 1을 지배하던 전성기였습니다. 런던에는 풍요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산업시대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 미의식이 쇠퇴하고 속물적이 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문학 예술계에는 유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미주의에는 데카당스와 댄디즘이 긴밀한 사조로 자리잡게 되는데, 데카당스는 “19세기 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예 현상. 병적인 감수성, 탐미적 경향, 전통의 부정 및 비도덕성 등이 특징이다.”, 댄디즘은 “겉치레나 허세 따위로 멋을 부리려는 경향.”이라고 다음 국어사전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요즈음 우리사회의 현상도 세기말적 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데자뷰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겪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연대기(年代記)입니다만 그 사건이 시작하고 발전하는 과정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화가 바질 홀워드와 그의 친구 헨리 워튼 경입니다. 화가 바질 홀워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자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바질은 도리언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게 되는데 초상화가 완성되는 날, 바질의 화실을 방문했다가 도리언과 상면하게 되는 헨리 역시 도리언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 친분을 맺게 됩니다. 순수청년 도리언은 풍자와 역설을 즐기는 헨리와 가까지 하지 말라고 하는 바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현란한 언변에 빠져들면서 비극은 싹트게 됩니다. 문학평론가 남진우교수는 도리언과 바질 그리고 헨리에게 각각 모델-화가-비평가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헨리는 바질이 그린 도리언의 초상화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로스베너 화랑의 전시회에 출품할 것을 권하지만 바질은 이 작품에 자신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화가는 작품을 통하여 평가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혼을 다하여 그렸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겠다는 바질의 말에서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예감을 느끼게 됩니다. 조금 더 읽으면, “빼어난 용모나 탁월한 지성엔 어두운 숙명이 깃들여 있어. (…) 해리, 자네에겐 지위와 재산이 있고 나에겐 두뇌가, (자네가 지성이라고 부른 것을 내가 갖고 있다면 말일세.) 그리고 예술이 있어.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에게는 빼어난 용모가 있지.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신들이 우리에게 준 것 때문에 고통을 치를 걸세. 그것도 혹독하게.(19쪽)”라는 바질의 예언과 같은 말에서 그 느낌이 구체화됩니다.

바질에게 도리언은 그의 본성을, 영혼을 예술 전체를 빨아들이는 존재였고, 그와의 교감을 통해서 그린 작품에는 자신의 영혼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리언으로 부터 어떤 영향력이 흘러나와 바질에게 전해졌고, 그로 인해서 평범한 숲의 풍경이 품은 경이로움을, 언제나 찾고자 했지만 늘 놓치기만 했던 그 경이로움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술을 마치 일종의 자서전처럼 대하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불행은 피하고 싶은 날 찾아온다고 했던가요? 어떤 친구에게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 친구인 헨리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바질의 조언은 도리언에게는 오히려 관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질이 초상화를 마무리하는 동안 헨리는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관능을 수단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영혼을 수단으로 관능을 치유하는 것이 인생의 위대한 비밀 중 하나”라는 등의 역설을 현란한 말솜씨로 설명하면서 도리언을 사로잡게 됩니다.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이죠.

완성된 초상화를 보게 된 도리언은 순간적으로 그림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 계시처럼 다가왔다. 전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홀린 나르시스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도리언은 헨리경이 들려준 청춘에 대한 기이한 찬사와 청춘의 급속한 소멸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의 얼굴이 주름살에 덮여 쪼그라드는 날이 올 터이고, 눈은 빛을 잃고 우아한 몸이 망가지고 일그러지는 날이 올 터이고, 진홍빛 입술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금실 같던 머리칼은 하얗게 바랠 것이다. 그의 영혼을 풍요케 할 삶이 그의 육체를 일그러뜨릴 것이다. 그는 끔찍하고 추악하고 지저분하게 변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날카로운 통각이 비수처럼 그를 찔렀고 그의 존재를 형성하는 섬세한 섬유들이 바르르 떨리게 했다.(53쪽)”

이런 두려움이 도리언으로 하여금 “영원히 젊은 쪽이 나고 늙어 가는 쪽이 이 그림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겠어요!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주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주겠어요!(54쪽)”라고 중얼거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나이어린 탓에다가 헨리경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가 부와 권력을 얻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파우스트보다는 순진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희망을 품게 된 것일 터입니다. (사실 저는 흰머리가 많은 편이라서 머리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것이라는 조언을 주변에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흰머리 또한 저의 본 모습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도리언은 바질에게서 자신의 초상화를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자신의 초상화에 저주가 쓰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들른 극장에서 만나게 된 여배우의 죽음이 계기가 됩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연기에 매혹된 도리언은 매일 그녀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가고 결국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되는데, 도리언이 바질과 헨리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날 줄리엣을 연기한 그녀는 줄리엣의 아름다운 대사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뱉습니다. 그녀의 끔찍한 연기에 놀란 도리언에게 그녀는 자신의 연기인생이 스스로를 속여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어요. 당신은 내게 현실이 진정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밤, 내 삶에서 처음으로, 내가 언제나 해 온 연기가 공허하다는 것을, 가짜라는 것을,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어요. (…)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연기하는 건 내게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될 것(152쪽)”이라고 자신의 연기가 변한 까닭을 설명한 시빌 베인에게 도리언은 “당신은 나의 사랑을 죽였어.”라고 중얼거리며 절교를 선언합니다. 시빌 베인 역시 어린 탓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연기의 진정한 매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에서 입가에 잔인한 조소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날 베인에게 주었던 절교선언이 지나쳤음을 후회한 도리언이 절교를 되돌리려 생각하고 있을 때 찾아온 헨리는 시빌 베인이 자신의 분장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도리언은 그와 그림 사이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교류가 멈추도록 기도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선뜻 버리지 못합니다. 유혹에 약한 인간의 심성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질은 시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순수청년 도리언에게서 따뜻한 마음도 연민도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집니다. 이 모든 것이 해리의 영향 때문이며 언젠가 이로 인한 벌을 받게 될 것을 예감하는 것입니다. 시빌의 죽음에 대한 도리언의 생각을 보면 도리언이 헨리를 닮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연기한 마지막 날 밤, 그녀는 사랑의 실제적인 위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엉망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 사랑의 비현실성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죽은 겁니다. 마치 줄리엣이 죽어야 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다시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지요.(189쪽)”

시빌 베인의 자살사건 이후 헨리가 보내준 한권의 책은 도리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파리에 살고 있는 한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주인공의 낭만적 기질과 과학적 기질을 그리고 심리적 변화를 그리고 있어 도리언 그레이의 자서전이라 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젊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도리언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자신의 외모를 두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감추고 일탈을 꾀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진즉 깨달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언은 어긋난 인생행로를 바로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휘둘리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는데 자신의 왜곡된 삶이 시작된 것은 바질이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충동적 생각 때문에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살인행각마저도 친구를 동원하여 흔적을 지우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쌓여가는 삶의 무게는 늙고 추악해져 가는 초상화를 칼로 찢어버리기에 이르게 된 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동안신화에 매몰되어 있는 분위기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는 욕망에 보톡스시술 등 좋다는 시술에 목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는 시술은 아직 없다는 것과 언제까지 젊어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신체의 젊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젊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젊어 보이는 모습보다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녹아든 모습이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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