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남규(이비인후과 전문의, 공보의)

의사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의대생 시절 임상실습(일명 PK, 폴리클)은 뭔가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같은 학생 신분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사용하는 신분증(ID card)를 발급받고, 겉으로 보기엔(?) 의사 같은 모습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기대되면서도 걱정되는 것은 아마도 실제 입원한 환자의 진료에 참여하면서 책에서만 보던 환자와 질병을 배운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환자를 통해 배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본과 3학년 첫 임상 실습 일정은 내과였다. 내과도 여러 분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폐나 기관지를 주로 다루는 호흡기내과 실습을 돌 때였다. 실습 때는 보통 교육 담당 치프가 정해주는 일정대로 외래나 병동 실습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담당 교수가 배정 되었는데 전공의들이 굉장히 무서워하는 교수 분이셨다. 학생들에게는 친절하셨지만 아무래도 소문을 들은 후라 굉장히 위축되어 실습을 따라 돌았다.

병동 실습에 앞서 특정 질환에서 나타나는 호흡음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고, 일반적인 회진을 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담당 교수를 따라 나섰다. 한 환자의 병실 앞에서 그 교수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제 같이 보게 될 환자는 실제 임상에서 보기는 흔치 않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미리 언질을 줬다. 그리고는 병실에 들어가서 '여기 같이 온 분들은 의과대학 학생들입니다. OOO 환자분의 질환에 대해 교육 중이었는데 괜찮으시면 청진을 같이 해 봐도 되겠습니까?'라고 아주 정중하게 환자분께 요청을 했다.

그 환자분은 너무나 흔쾌히 동의했고, 나를 비롯한 실습 학생들은 책에서만 보던 흔치 않은 질환을 가진 환자를 청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책만 보면서 달달 외우면 금방 잊어버리고, 헷갈리던 호흡음을 직접 환자를 통해 들어보니 확실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흔치 않은 환자를 보고 임상실습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만족하면서 병실을 나온 순간, 저 멀리서 그 환자의 부인이 슬프게 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환자는 흔쾌히 동의하고 교육에 참여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의 입장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켰나 보다. 그 순간 환자와 주변 가족도 '감정'을 가진 존재인데 나는 그것을 놓치면서 실습을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수련 병원에서 진료 받는 환자는 일정부분 의사나 의대생의 교육에 참여될 수 있음은 병원의 설립 취지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그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에게 충분한 '설명과 동의', 그리고 감정을 해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환자를 통해 배운 직접경험은 몇 년이 지나도 기억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훌륭한 의사를 길러내는데 있어서 환자를 통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고 경험이 적은 의사나 학생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환자와 간병중인 보호자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고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지나치게 이기적인 행동과 생각을 가진 환자나 보호자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전문의만 선호하는 환자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도 의료현장에서 겪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비판만 하기 보다는 전공의나 학생 실습에 환자를 참여 시키기 전에 충분한 설명과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 예를 든 그 교수 분의 경우 이미 환자와 '라뽀(RAPPORT)'가 쌓여 있기도 했겠지만, 정말 정중하고 자세한 설명을 하고 나서 환자의 동의를 구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국내 의료제도의 특성상 의사가 많은 환자를 볼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환자와 의사가 대화하고 라뽀를 쌓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제도의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점을 고쳐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환자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류남규는?

성균관대 의대를 졸업하고 삼성서울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전공의 수련을 마쳤다. 현재 보건소에서 공보의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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